테트리스가 생각나는 성 바실리 성당, 크렘린 궁, 밀랍으로 봉인된 레닌, 붉은 광장의 도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Москва다. 

비행기 바퀴가 셰르메체보Шереметьево 공항 활주로에 닿자 사람들이 또 박수치고 환호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한 번 경험한 일, 우리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함께 환호했다. 

무사한 비행을 축하하고 스텝의 수고에 감사하는 이 사람들의 이런 방식이 재미있다. 

Moscow is a city of superlatives. It boasts the most billionaires, the most expensive cups of coffee and – coming soon – the most colossal building in the world. It is also the most expensive and, according to one poll, the most unfriendly city in the world. 

모스크바는 ‘최상급’의 도시입니다. 이를 테면 ‘세계에서 억만장자가 가장 많은’ 도시, ‘커피값이 가장 비싼’ 도시, (곧 완공될) ‘가장 거대한 건축물이 있는’ 도시지요. 물가도 가장 비싼 도시입니다, 아, 어느 조사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불친절한 도시이기도 하고요.
 

객관적 정보와 주관적 편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기 마련인 가이드북은 
모스크바에 대해 첫 문장부터 비아냥 섞인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고보니 우리와 역방향으로 움직이던 여행자들로부터도 모스크바에 대해 좋은 평을 들은 적이 없다. 

나쁜 선입견은 갖지 말자 고개를 흔들어 듣고 읽은 말들을 털어내 보지만,
공항을 빠져 나오는 사이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곧 깨달았다.
마치 태어나 한 번도 웃어본 일 없는 것 같은 표정의 공항 직원들이 

“저기, 이거요” 하고 떨어진 단어들을 꼼꼼히 주워 도로 붙여 준 느낌이랄까. 

공항에서 미니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 시내에서 다시 메트로(전철)로 우리가 묵을 장소로 가야 한다.
언제나 탈 것에 몸을 싣고 움직이는 일은 즐겁다 - 도심까지 들어가는 차비가 20루블(800원 정도)에 불과한 버스라면 더더욱.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출발 전 운전사가 맨 앞 좌석부터 차비를 현금으로 걷었다. 
방긋, 웃으며 하이, 하고 50루블을 내미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불쾌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쉰다. 
거스름돈 주기 싫다고? 하는 표정으로 마주 보니 이 운전사,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둘을 번갈아 손가락질 해 가며 지폐다발을 손바닥에 팡팡 쳐 가며 버럭버럭, 알아 들을 수 없는 러시아말. 
이 소란에 주변의 러시안들 누구도 참견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다. 하여간 어딜 가나 도시인들이란. 

한 사람당 20루블이라며? 

슬슬 올라오는 민망함과 짜증을 감추고 나 역시 그가 알아 듣거나 말거나 태연히 영어로 되물었다. 
심사가 더 뒤틀렸는지 도끼눈을 홉뜨는 그를 보다 못한 군복 차림의 청년이 끼어든다. 

당신들은 외국인이라 요금이 다르대요. 한 사람당 60루블이라네요. 120루블을 내야 해요. 

가이드북의 다른 구절이 떠오른다. 

… 또한, 여행자는 모스크바 도처에서 마주칠, 두 배에서 여섯 배에 이르는 악명 높은 외국인 요금제를 견뎌야 합니다. 

서로 안 통하는 말로 더 주고 받아 봐야 상한 기분도 상황도 바뀌는 것 없이 시간만 지체할 뿐, 
체념하고 돈을 내밀기가 무섭게 운전사 양반, 돈을 탁 채서 운전석으로 돌아간다. 
고맙기도 해라, 이런 요란한 환영이라니. 

우리가 찾아가는 ‘모스크바 스타일 호스텔 Moscow Style Hostel’이 놓인 트베르스카야 거리Тверская улица는 
크렘린Кремль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방사형 도시 모스크바의 핵核에 해당하는 중심가다. 

메트로(지하철)에서 나오니 메트로폴리스의 풍경이 아이맥스처럼 시야를 압도했다. 
왕복 8차선쯤 되는 도로를 가득 메운 채 빵빵거리는 차들, 그 속에 심심치 않게 섞인 아우디 베엠베와 
거리 양쪽에 도열한 채 사람을 내려다보는 으리으리하고 커다란 건물들, 바깥 온갖 브랜드의 화려한 비주얼과 
인도를 꽉 채우고 서로 어깨 밀치며 무표정하게 지나가는 세련된 차림의 사람들과 대비되어 드물게 눈에 띄는 걸인들. 

데자뷰 déjà vu. 
광화문과 삼성동에서 5년 넘도록 저토록 바쁘게 길을 걸으며 물리도록 본 풍경의 비슷한 아우라와
좀처럼 그 곳에 ‘속해 있다’거나 그 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지 못해 부대끼던 그 이물감이 떠오른다. 
역시 나는 ‘시크한 도시 여자’이긴 틀렸어. 

우리 둘만, 그 풍경에 애처로이 동동 뜬 ‘백치섬’이 된 기분이었다. 
서울역에 처음 떨어진 상경객의 심정이 그럴까, 인천공항을 처음 빠져나온 이주노동자의 심정이 그럴까. 
하필 순간 떠 오른 생각까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데가 이런 데야?’ 하는 시골스러운(?) 감상.


정말 코라도 움켜쥐어야 어울릴 듯한 어벙한 모습으로 길을 걸었다. 예언처럼, 

곧 친절한 어느 환전상이 모기 눈알처럼 박힌 영문 안내를 빌미로 제법 되는 수수료를 갈취했다.
그것 봐. 눈 감으니까 코를 베였어. 내 코를 베어 갔어. 

 

블라디보스톡부터 바이칼까지 시골에 푹 빠져 머문 여드레 동안 컴퓨터 하드처럼 포맷format이라도 된 건지 
마치 한 번도 이런 큰 도시를 밟아본 적 없는 것 같은 백지 같은 우리들은 
시크한 이 도시 풍경을 ‘살기 어린’ 것으로, 도회적인 표정의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호스텔에 짐을 부린 후 일단 무작정 동네 길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우리 방식의 인사, 
게다가 호스텔부터 붉은 광장까지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라 
동네(태평로부터 경복궁에 이르는 것과 비슷한 풍경을 ‘동네’라 부를 수 있다면)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화려한 대도시의 활기, 백야의 계절이 아니어도 충분히 밝은 불야성의 밤, 
억지로 흥미를 끌어올려 보려 하지만 어쩐지 자꾸 기분이 처진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저녁 거리도 살 겸, 구경도 할 겸 동네 마가진(마트)에 들렀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에 높은 천고가 우아한 공간, 깔끔한 유니폼의 깍듯한 점원들이 시중을 들(면서 감시하)던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 같은 곳에서 나는 여행 중 신기해하며 체득한 '적은 것의 충분함'을 잃었다. 

커다란 쇼핑 바구니에 담은 우유 하나, 곡물빵 한 개 같은 것들이 빈곤하고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더 살 것이 없는지’, ‘더 먹고 싶은 것이 없는지’, ‘왜 없는지’ 장군을 끊임없이 채근했다. 

너 왜 그러니. 

장군이 발을 멈추고 아내의 이상 행동을 제지한다. 
뭐라고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어쩐지 입을 열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시무룩하게 심통을 부리며 기어이 커다란 훈제 닭다리 하나와 맥주를 넣었다. 

나 먹으라고? 나 별로 안 먹고 싶어. 넌 먹고 싶어? 먹을 수 있어? 그것도 아니잖아. 
응, 나 먹을래. 밤에 가서 먹을 거야. 

실은 별로 먹고 싶지도 않으면서, 이 늦은 시간에 이 컨디션으로 먹으면 탈이 날 것을 알면서. 
서른 살 아내의 세 살 같은 과잉 행동을 물끄러미 보던 장군은 무슨 생각인지,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하고 더 말리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걸까. 뭐가 잘못된 걸까. 
대단히 부당한 대우를 당한 것도, 스킨헤드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도 아닌데 
휘저어진 진흙탕처럼 엉망이 된 마음보와 행동, 정말 이 도시가 우리와 맞지 않는 탓일까. 

설상가상 
호스텔엔 여행자보다 돈 벌러 모스크바에 흘러 들어온 장기 체류형 남자들(과 모스크바 여자 몇)이 대부분이다.
도무지 못 알아 들을 발음의 영국 출신 영어 학원 선생 ‘히이Hugh(보통은 ‘휴’)’가
우리를 경계하면서도 굳이 트렁크 깊숙한 곳에서 돈 뭉치를 꺼내 세던 방을 나와
혹시나 해서 확인한 ‘아침 제공’이 역시나 ‘유통 기한 지난 빵 몇 개’임을 확인하고 
담배 냄새 나는 지저분한 부엌에서 차가운 닭다리를 포크로 헤집으며 결국 말하고 말았다. 

남편, 도착하자마자 미안한데, 나 최대한 빨리 이 곳을 빠져 나가고 싶어졌어.
동감이야. 몇 일 머물 것 없이 오늘만 자고, 내일 하루 돌아 보고 밤차로 움직이자 페테르부르크로. 

‘혁명의 도시’ 모스크바와 ‘예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둘 다 무척 매력적인 곳일 테니 
일단 가 보고 결정하자! 며 어디서 얼마를 머물 지 열어 둔 채 러시아 동쪽으로 날아온 차였건만. 

단 몇 시간만에 모스크바는 우리에게 매력도, 인심도 잃은 도시가 되었다. 
여유가 있다면 그래도 정을 붙여 보자 하루이틀쯤 더 노력하겠지만, 우리에겐 그럴 물리적 시간이 없다. 

날이 밝으면, 잘 자고 여섯 시간 비행의 여독이 풀리면, 좀 더 괜찮을 지도 몰라. 
내일 하루만, 부디 사이 좋게 지내자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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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1. 조기성 2010/12/23 11:00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아이고~~ 맘 고생 하셨겠어요. 어딜가나 나쁜 놈들, 도둑놈들은 있다니까. 에고~~

    • Abby. 2010/12/24 08:38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네, 그들에겐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나라들이 많더라고요.
      외국인 요금이라는 것, 이해는 하지만 참 치사해요!

  2. 박혜연 2011/10/28 22:22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선진국에서 같았으면 이런일은 있을수없는데 저도 옛날에 러시아를 다녀와서 잘아는데 진짜 러시아인들은 인정사정도 없는 차디찬인간쑤레기들이얘요! 호텔시설도 몇몇 최신식호텔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노후화가 된것도 모자라서 직원들의 불친절은 말도 못한다고 모스크바 관광객들이 한소리 했을거얘요! 숙박비는 세계최고인 도시인주제에~!

    • Abby. 2011/11/03 03:41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오오, 러시아에 연주 갔던 거야? 응, 모스크바는 정말 그랬어. ㅎㅎ 지금까지 우리 다닌 곳들 합해도 손꼽히게 차가운 도시였던 것 같아. 이든이 보고 싶어, 사진 좀 보내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