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에서의 시간은 빨랐다. 빈을 채우다 보면 어느 새 쉬는 시간, 점심 시간,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하루가, 일주일이, 다섯 주가 빠르게 흘렀다. 마치 드래곤볼의 <시간과 공간의 방>처럼, 바깥 세상과는 다른 시계가 걸린 것 같았다.
장군은, 아버지 생각이 나, 하고 자주 얘기했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택시 운전을 하셨고, 아들이 태어난 후 몇십 년을 한 곳에서 카센터를 운영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의 정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심한 아들은 이제서야, 오롯이 몸을 움직여 돈을 버는 날들의 고단함과 그 고단함을 먹고 자란 길고 긴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나로선 과일밭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으나, 오래 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만취한 대표의 얼굴에 겹치던 내 아버지, 밥벌이의 그 치사함과 서러움을 견디기에 여렸던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었다. 비슷한 마음이리라.
장군은, 네가 고생을 안 해서 물정을 모른다는 부모님 말씀에, 평생 고생 안 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 거지, 하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나는, 간혹 술에 기대 설움을 부서뜨리는 내 아버지에게, 아빠만 힘든 거 아냐 모든 아빠들이 다 그렇게 살아, 하는 차가운 말을 비수처럼 꽂았었다. 우리는 못되고 늦된 자식들이었다.
우리들의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오래 전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장군의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시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다소 머뭇대며, 응, 엄마, 저, 자동차 수리, 하는 일을 오래 하셨어, 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그렇구나, 고생이 많으셨겠구나. 그렇게 성실하고 정직한 손으로 벌어서 두 남매 훌륭하게 키우셨구나, 하셨다.
철없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엄마를 실망시키면 어떻게 하나 지레 염려했던 것처럼, 내가 사는 곳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손들이 하는 일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는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필수적 요소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가장 많은 돈과 존경이 가야 할 일들임이 분명했다. 과수원은 우리 안에 그에 대한 감각을 깨웠고, 오랜 시간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이들에 걸맞는 감사를 드리게 했다.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힘이 들었다. 힘든 노동을 감내하는 데 대한 감사는 커녕, 예의 그 못된 질서대로 함부로 취급되었다. 과일 따는 속도가 느려질라 치면, 죽고 싶어? Do you wanna die? 하는 말이 날아들었고, 속도를 내느라 지나온 나무에 과일을 남기면, 너 한국으로 보내 버린다 I'll send you back to Korea 하는 말이 뒤통수를 쳤다. 이상하게 내뱉은 말들에 얻어맞고 나면 피로는 훨씬 빨리 찾아왔다.
장군은 그 팍팍함보다, 자신의 손을 거친 과일이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복숭아나 사과나 배로 만들어진 파이가, 잼이, 주스가, 다르게 보일 것만 같았다. 친구들에게 잼을 사거든 호주산 과일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라고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주를 떠나기 직전 시드니로 잠시 돌아온 후, 늘 가던 과일 가게에서 우리 농장 배를 발견하고 잃은 자식 만난 듯 어쩔 줄을 몰라했다.
농장이 모르는 것 하나는 농장의 일꾼들이 농장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일하는 동안 우리는 오롯이 나무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열매가 무거워 축축 늘어지거나 부러진 가지를 견디는 나무를 가뿐하게 하는 것은 나비나 벌이나 첨단의 농기계 아닌 사람만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무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느낌, 가지를 털고 나면 좋아하고 고마워한다는 느낌에 대해 몇몇 동료들도 동의했다. 나무를 위해 일을 하면, 농장이 돈을 준다 - 그것은 마치 나무와 우리들끼리의 재미있는 비밀 같기도 했다.
과일을 따는 중에 우리 안에 스민 생각과 마음은 참, 뻔했다. 그런데 그 뻔한 것을 이야기하는 내 남편이 내게는 전혀 뻔하지 않았다. 나무에서 바로 딴 과일만큼이나 싱싱한 감각들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고, 그것을 말하는 그의 눈은 어린 아이 같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벅찬 경험이었다.
농장 일을 마쳤다. 내 팔에는 그토록 바라던 말근육이 조금 붙었다. 바싹 마른 장군의 팔은 근육이 붙자 자꾸, 팔에 힘 줘 봐, 하며 쳐다볼만큼 꽤 근사해졌다. 근육 위에 크고 작은 상처도 남았다. 찍히고 긁히고 부딪치고 넘어지며 생긴 수많은 생채기로, 아직 우리들의 팔다리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에도 조금, 근육이 붙었다.
바친 제물들도 있었다. 농장은 내가 애지중지하던 신혼여행 선글라스와 장군의 휴대폰을 꿀꺽 삼켰다. 비싼 모자엔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땀얼룩이 생겼다. 트랙터의 기어에 걸린 나의 개량 한복 바지는 상어에 뜯긴 듯 엉덩이부터 무릎까지 주욱 찢어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수시간에 걸쳐 천 바늘을 꿰매는 의지의 대수술로 회생하는 듯 했으나, 마지막 날 다시 한 번 트랙터에 같은 자리가 찢어짐으로써 사라진 나의 의지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
우리가 과수원에 도착한 첫 날, 어머니들은 담담하시지 못했다. 두 분 모두 저녁에 전화를 하셨다. 애비의 어머니는 외출 중 호주의 평원만큼이나 드넓은 중국의 들판을 보며 눈물을 뚝뚝 떨구셨다 했고, 장군의 어머니는 장군과 짧게 통화 후 이례적으로 애비를 바꾸라는 말씀 없이 전화를 끊으셨다. 우리들의 여정에 따라 때마다 만만치 않은 감정 노동을 감내하시는 어머님들께, 나중에 과수원이라도 하나 차려 드리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만 우리들의 여행이 우리 둘만의 것이 아님을 다시 생각할 뿐이다.
마지막 날, 마지막 빈을 비우고 트랙터로 빈 밭을 돌며 "안녀어엉!" 하고 크고 길게 외치는 순간, 울컥, 눈물이 솟았다. 다시 작별이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과 풍경과 사람이 그렇듯 - 그러니 결국 생의 모든 순간이 그렇듯 - 다시 오지 않을 한 절의 시간이 우리들을 흘러갔음을 실감했다. 힘껏 문질러 빨아도 지워지지 않던 장갑의 복숭아 향처럼 진했던 시간, 벌써 그 시간이, 몹시 그립다.
장군은, 아버지 생각이 나, 하고 자주 얘기했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택시 운전을 하셨고, 아들이 태어난 후 몇십 년을 한 곳에서 카센터를 운영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의 정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심한 아들은 이제서야, 오롯이 몸을 움직여 돈을 버는 날들의 고단함과 그 고단함을 먹고 자란 길고 긴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나로선 과일밭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으나, 오래 전, 접대하는 술자리에서 만취한 대표의 얼굴에 겹치던 내 아버지, 밥벌이의 그 치사함과 서러움을 견디기에 여렸던 그를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었다. 비슷한 마음이리라.
장군은, 네가 고생을 안 해서 물정을 모른다는 부모님 말씀에, 평생 고생 안 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 거지, 하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나는, 간혹 술에 기대 설움을 부서뜨리는 내 아버지에게, 아빠만 힘든 거 아냐 모든 아빠들이 다 그렇게 살아, 하는 차가운 말을 비수처럼 꽂았었다. 우리는 못되고 늦된 자식들이었다.
우리들의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오래 전 어느 날이었다. 엄마가 처음으로, 장군의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시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다소 머뭇대며, 응, 엄마, 저, 자동차 수리, 하는 일을 오래 하셨어, 했다. 엄마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더니, 그렇구나, 고생이 많으셨겠구나. 그렇게 성실하고 정직한 손으로 벌어서 두 남매 훌륭하게 키우셨구나, 하셨다.
철없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엄마를 실망시키면 어떻게 하나 지레 염려했던 것처럼, 내가 사는 곳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손들이 하는 일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는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필수적 요소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가장 많은 돈과 존경이 가야 할 일들임이 분명했다. 과수원은 우리 안에 그에 대한 감각을 깨웠고, 오랜 시간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이들에 걸맞는 감사를 드리게 했다.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힘이 들었다. 힘든 노동을 감내하는 데 대한 감사는 커녕, 예의 그 못된 질서대로 함부로 취급되었다. 과일 따는 속도가 느려질라 치면, 죽고 싶어? Do you wanna die? 하는 말이 날아들었고, 속도를 내느라 지나온 나무에 과일을 남기면, 너 한국으로 보내 버린다 I'll send you back to Korea 하는 말이 뒤통수를 쳤다. 이상하게 내뱉은 말들에 얻어맞고 나면 피로는 훨씬 빨리 찾아왔다.
장군은 그 팍팍함보다, 자신의 손을 거친 과일이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복숭아나 사과나 배로 만들어진 파이가, 잼이, 주스가, 다르게 보일 것만 같았다. 친구들에게 잼을 사거든 호주산 과일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라고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주를 떠나기 직전 시드니로 잠시 돌아온 후, 늘 가던 과일 가게에서 우리 농장 배를 발견하고 잃은 자식 만난 듯 어쩔 줄을 몰라했다.
농장이 모르는 것 하나는 농장의 일꾼들이 농장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일하는 동안 우리는 오롯이 나무들을 위해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열매가 무거워 축축 늘어지거나 부러진 가지를 견디는 나무를 가뿐하게 하는 것은 나비나 벌이나 첨단의 농기계 아닌 사람만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나무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느낌, 가지를 털고 나면 좋아하고 고마워한다는 느낌에 대해 몇몇 동료들도 동의했다. 나무를 위해 일을 하면, 농장이 돈을 준다 - 그것은 마치 나무와 우리들끼리의 재미있는 비밀 같기도 했다.
과일을 따는 중에 우리 안에 스민 생각과 마음은 참, 뻔했다. 그런데 그 뻔한 것을 이야기하는 내 남편이 내게는 전혀 뻔하지 않았다. 나무에서 바로 딴 과일만큼이나 싱싱한 감각들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고, 그것을 말하는 그의 눈은 어린 아이 같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벅찬 경험이었다.
농장 일을 마쳤다. 내 팔에는 그토록 바라던 말근육이 조금 붙었다. 바싹 마른 장군의 팔은 근육이 붙자 자꾸, 팔에 힘 줘 봐, 하며 쳐다볼만큼 꽤 근사해졌다. 근육 위에 크고 작은 상처도 남았다. 찍히고 긁히고 부딪치고 넘어지며 생긴 수많은 생채기로, 아직 우리들의 팔다리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우리들 마음에도 조금, 근육이 붙었다.
바친 제물들도 있었다. 농장은 내가 애지중지하던 신혼여행 선글라스와 장군의 휴대폰을 꿀꺽 삼켰다. 비싼 모자엔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땀얼룩이 생겼다. 트랙터의 기어에 걸린 나의 개량 한복 바지는 상어에 뜯긴 듯 엉덩이부터 무릎까지 주욱 찢어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수시간에 걸쳐 천 바늘을 꿰매는 의지의 대수술로 회생하는 듯 했으나, 마지막 날 다시 한 번 트랙터에 같은 자리가 찢어짐으로써 사라진 나의 의지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
우리가 과수원에 도착한 첫 날, 어머니들은 담담하시지 못했다. 두 분 모두 저녁에 전화를 하셨다. 애비의 어머니는 외출 중 호주의 평원만큼이나 드넓은 중국의 들판을 보며 눈물을 뚝뚝 떨구셨다 했고, 장군의 어머니는 장군과 짧게 통화 후 이례적으로 애비를 바꾸라는 말씀 없이 전화를 끊으셨다. 우리들의 여정에 따라 때마다 만만치 않은 감정 노동을 감내하시는 어머님들께, 나중에 과수원이라도 하나 차려 드리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만 우리들의 여행이 우리 둘만의 것이 아님을 다시 생각할 뿐이다.
마지막 날, 마지막 빈을 비우고 트랙터로 빈 밭을 돌며 "안녀어엉!" 하고 크고 길게 외치는 순간, 울컥, 눈물이 솟았다. 다시 작별이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과 풍경과 사람이 그렇듯 - 그러니 결국 생의 모든 순간이 그렇듯 - 다시 오지 않을 한 절의 시간이 우리들을 흘러갔음을 실감했다. 힘껏 문질러 빨아도 지워지지 않던 장갑의 복숭아 향처럼 진했던 시간, 벌써 그 시간이,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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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