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시, 여행

길 위에/Russia, 2009 | 2010/10/26 14:36 | written by Abby.
장거리 비행만한 보양이 없다 너. 주는 거 먹고, 먹고선 자고. 자다가 먹을 때 되면 저절로 눈이 떠져요.
지루할 땐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다 할 수 있어.


열 여섯시간에 가까운 비행 시간에 미리 질려하는 나를 달래듯 여유를 부리는 장군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난다.

우리는 러시아에서의 보름 내내 마치 만난지 얼마 안 된 이들처럼 서로에게 감동했고
바로 그 다음 순간 너의 이러저러한 방식을 참아줄 수가 없다며 살천스레 싸우기를 반복했었다.

이를 테면
난 어디서든 무엇이든 신기해하는 아내가 신기해, 하며 피식 웃는 그의 손을 잡고 사이 좋게 걷곤
바로 몇 시간 후 전철을 잘못 타 도착한 어느 낯선 동네에선
나는 누군가에게 길을 묻지 않고 자꾸 스스로 해결하려는 그가 꼴보기 싫어 아픈 허리를 잡고 서서 큰 소리로 울고
그는 그 동안 쌓인 나의 비난 섞인 잔소리에 단단히 화가 나 그 밤 잠이 들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던가.

스물 네 시간을 붙어 지내는 여행 중 우리의 관계와
지갑과 몸이 버틸 수 있는 잠자리, 먹거리, 이동 수단의 상한과 하한, 
여행 중 마주치는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 앞 우리들 감수성의 역치와 한계 효용 ㅡ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긴 여행에 앞선 일종의 실험이었던 러시아 여행이 끝났다.

덜컹, 하고 비행기 바퀴가 인천 땅에 닿았다.
환호하거나 박수치지 않고 미리부터 일어나 짐을 챙기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끼리 조용히 박수를 치며 아, 한국에 도착했구나, 실감했다.

우리, 앞으로 반 년 동안 서울 여행 한다고 생각하자! 

장군이 씩 웃으며 말한다. 좋은 여행의 기운을 담은 얼굴이다.
삶을 여행으로, 여행을 삶으로 여기며 살 수 있다면 ㅡ 그것이 여행이 주는 선물일 테다.

여행을 마친 후 우리의 일상 역시 실험의 범주 안에 있었다. 그러나,

도착 후 시차 적응할 새도 없이 하루만에 장군은 회사로 복귀했고
나도 곧 비즈니스 수트에 담겨 하이힐을 타고 출근을 했다.
회사는 여전히 시속 130km의 볼이 날아드는 배팅 연습장 같았고
그도 나도 잠시 멈칫했으나 금세 다시 자세를 잡고 볼을 쳤다.

그리고, 운동을 했다.

아픈 허리
에 대해 정형외과 전문의는 
디스크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다른 질환이 생긴 것은 아니고
새로울 것 없는 선천적 근육 부족에 최근 늘어난 체중을 끌고 무리하게 걸었기 때문이니
몸을 좀 줄이고 근력 운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하나마나한 조언을 권위 있는 의학적 소견으로 들려 주었다.
그만큼 걸었으면 체중이 빠져야지 허리가 나가는 건 뭐야, 투덜댔지만 실은 아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사의 처방이 네게 하나마나한 소리로 들린 것은 그것이 너무나 지당한 말이기 때문이라 여긴 장군은
일주일에 몇 번씩, 출근 전 새벽마다 본인도 눈을 채 못 뜬 채 조는 나를 끌고 나가  운동을 하게 했다.

또, 글을 썼다.

이후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겠다는 결심을 할 수 없는 긴 여행에 대해
열심히 기록하겠어요 - 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었으므로
러시아의 보름을 글로 엮는 것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을지 내가 나를 지켜보는 테스트였다.
잘 쓰지 못할 수는 있으나 거짓말은 하지 않아야 했고
시간이 걸릴 수는 있으나 중간에 멈추지 않아야 했다.

몇몇 강렬한 순간은 내내 고이 담겨있었던 듯 잔을 기울이기만 하면 되었지만
불행히도 대개의 기억은 땡볕에 쏟아진 소주처럼 빠르게 휘발되었다.
여행다운 여행이 처음이었으니 날아가는 여행의 기억을 붙잡는 것도 처음,
메모와 메모, 사진과 사진, 음악과 음악 사이 빈 공간을 복기하는 일은 고도의 집중을 요구했다.
게다가 배팅 연습장에서도 공과 공이 날아오는 사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던 어느 성공하는 사람들의 내공이 내겐 없으니
글 쓰는 일은 쉽지 않았고, 시간도 아주 오래 걸렸다.

글을 쓰곤 꼭 장군에게 물었다 - 내가 부풀리거나 거짓말을 하진 않았어? 이번 꼭지는 어떻게 생각해?
그는 때로 어떤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날카로운 피드백을 주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냉동실에서 꺼낸 보드카를 홀짝이며 맞아, 그런 일이 있었어, 그 곳은 그랬었지, 하고 즐거워했다.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미심쩍은 얼굴을 하지 않고 재미있어한다면, 나는 계속 글을 써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전반적인 실험 이후 우리는 좀 더 여행을 기대하게 되었고, 빨리 떠나고 싶어졌었다.
그리고 무사히 마친 실험 덕에 우리는 지금 예정대로의 여정 위에 있다.

어제 초대받았던 친구 부부의 집에서
저녁 후에 함께 마신 차가 러시안 캐러반(Russian Caravan)이었다.
거짓말처럼, 차에선 정말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먹은 맛있는 생선 오물의 향이 났고 
봄 여름을 살고 다시 봄 여름을 살게 된 지금, 러시아의 쨍소리나는 찬바람이 무척 그리워졌다.

술을 즐기지도 않으면서 지금처럼
보드카 한 잔이 무척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보드카는 모름지기 로시아 스땅다르트(Русский Стандарт)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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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 뿐이니, 알펜 골드도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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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1. 조기성 2010/12/27 05:52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드뎌 돌아오셨군요~~ㅋㅋ

    "나도 곧 비즈니스 수트에 담겨 하이힐을 타고 출근을 했다." 와~ 이런 표현은 촌철살인입니다. 보드카 '그게' 짱리라는 거 기억하겠습니다. 알펜 골드는 초코파이 같은 건가요?

    우째 내가 집에 돌아온 느낌일까요....ㅋㅋㅋ

    • Jang. 2010/12/27 18:14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간사님도 러시아 글 통해서 같이 다녀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ㅋㅋ

    • Abby. 2010/12/27 20:21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알펜골드는 초코파이보단 단단하고 빅파이보단 부드럽고, 초컬릿이 잘 덮여 있는 속엔 과일잼이 두텁게 채워져 있어요. 으읍. 다시 먹고 싶다! 그리고 유독 '로시야 스땅다르트'는 한국에 없더라고요. 보드카는 그것이 진리입니다. 제가 공항 면세점 안의 바에서까지 물어보고 확인한 정통 러시아 보드카예요. ㅋ

      간사님 덕분에 저도 장군도 러시아 여행기 다 읽었어요. ㅎㅎ
      간사님 하시는 얘기를 보며 또 다시 둘이 얘기도 하고요.
      아, 그런 생각을 했구나. 그런 걸 봤구나. 이런 거리가 있었지.
      지금은 더 나은 여행을 하고 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 무척 좋은 독자세요! ㅎㅎ

    • 조기성 2010/12/28 07:37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Abby님,
      그렇군요. 보드카를 마시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던데, 그리고 속에서 천불이~~ㅋㅋ 꼭 마셔보고 싶네요....ㅋㅋ

      제가 호사를 누리고 있지요~~

      감사합니다...ㅋㅋ


      Jang님.
      그러게요. 제가 숨이 다 차네요.
      오래 집떠났다가 돌아왔으니
      저도 좀 쉬어야 할까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