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 여덟살이었다.

어느 날 집에 오니, 아빠의 근사한 사무실 집기들이 우르르 처박힌 박스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빠는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도 좋다고 하셨다. 사무실에 가면 늘 탐냈던 펜이라던가 메모 패드라던가 스티커라던가 하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아냐, 안 가질래. 아무것도 택하지 못했다. 우리 남매에게 범접할 수 없는 별세계였던 안방 침대 옆 아빠의 장식장이나 비즈니스 수트 케이스, 아빠만의 세계에 고이 들어가야 할 물건들로 보였다.

곧 엄마와 아빠는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 '금곡'이라는 동네에 세탁편의점을 여셨다. 철없는 나는 '그런 일'을 시작한 엄마 아빠에 대한 연민과 부끄러움으로 괴로워했고, 더욱 철없이는, 미숙한 초보 자영업자 부부에게 큰소리치는 진상 손님을 죽여버릴 기세로 건드려 엄마아빠를 더욱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그 시절, '일 인분 삼천원 삼겹살' 류의 저렴한 외식업이 등장했다. 모두가 살 길을 찾아야 했던 때, 삼천원 고깃집은 우리집 세탁편의점의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우리 가게 맞은편에 처음 그런 간판이 걸린 날, 엄마는 기쁜 얼굴로 "우리 오늘 저녁엔 저기에 가 보자!" 했다. 물론, 삼천원짜리 삼겹살이 얼마짜리 생고기와 같을 수 없었고, 삼천원짜리 고깃상이 태릉 초가집의 반상과 같을 리 없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생각지도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얼만큼의 차이일지 예상할 만큼 밝지도 못했다.

집은 젓가락을 환히 비추는, 어디 한 군데 구멍도 내지 않고 부서질 듯 얇게 민 그 날의 고기는 종이와 고기의 경계는 어디서 갈리는가를 묻는 아트였다. 엄마는 쟁반에 나온 고기를 보더니 그보다도 하얀 백짓장같은 얼굴이 되었고, 말없이 고기 한 판을 올려 굽다 뜨거운 불판에 채 십초를 견디지 못하고 와그러지는 고기와 함께 허물어지고 말았다. 오래 묵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아빠는, 에이, 왜 그래 이 사람은 참, 하고 타박하며 엄마에게서 집게를 빼앗아 고기를 구웠다. 이 사람은 참, 하는 아빠의 말끝도 그다지 단단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열심히 먹었다. 참 재미 없는 외식이었다.

'야자'라는 잔인한 추억, 국영수보다는 야근을 선행 학습하던 비효율적 강제 노동이 있었다. 선생들은 고 3 주제에 중화동 극장 구석에 숨어 '타이타닉'을 보는 나 같은 미꾸라지들을 다루는 방법, 본인들의 야근과 피로를 줄이는 방법으로 '학부모 감독제'를 도입했다. 만만한 건 반장 엄마라, 우리 엄마는 한 달에 한두 번 세탁편의점 정리를 아빠에게 맡기고 학교에 오셨다.

그런데 야자 시간에 교실 천장에 야광별이나 붙이던 내가 탐탁한 반장이 아니었듯, 엄마 역시 감독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는 아이들은 푹 자게 놔두었고, 지지난 주에도 지난 주에도 이번 주에도 생리통이 심해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 달 내내 생리 중일, 집에 가고 싶은 아이들에겐 저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학교에 와서 늘 제일 먼저 한 일은 우리 교실 창문을 똑똑 두들기고 방가방가, 내게 크게 손을 흔드는 일이었다. 내 참, 선생님들이 이걸 알까. 엄마는 자격 미달이야.

종일 세탁편의점에서 시달린 후 그 피곤할 시간에, 엄마는 정말이지 아주아주 행복해 하셨다. 벚꽃 흐드러지던 나무가 맨몸이 될 때까지 그 해 내내, 때로는 경희대 입구부터 회기역까지 걷기도 했고, 피로가 꼭꼭 들어찬 만원 마을버스를 타기도 했던 때, 엄마는 늘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자주, "엄마에겐 이 시간이 몹시 소중해." 하고 꼭꼭 눌러 말했다. 엄마는 교복 입은 너를 보면 가슴이 아릿할 때가 있어. 교복 입은 우리 따니랑 이렇게 손 잡고 밤길 걷는 날, 야자하는 우리 따니를 기다렸다 집에 올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어. 생각해 봐, 정말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구. 엄마는 학교 오는 날이 아주 고맙고 행복해. 소중하고 또 소중하지.

그 사심 가득한 야자 감독이 오시는 날이면, 나는 오후부터 설레였다. 그리고 그 날들은, 정말 짧았다. 그 후로 십년도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으나, 엄마가 꼭꼭 눌러 준 그 시간은 내 안에 고이 남았다. 나는 엄마에게 그런 많은 '순간'을 물려 받았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엔 간혹, 깊은 밤, 늦게 들어오신 아빠가 방문을 열고 자는 나를 가만히 다독일 때가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깥 공기와 인기척에 잠이 깨 징징거리며 짜증 섞인 잠투정을 하면 아빠는 그랬다. 아, 아빠가 우리 애비 깨웠어? 아무것도 아냐, 자, 다시 자, 아빠가 미안해, 다시 자- 서둘러 이불을 여며 주고 나가시는 아빠가 닫는 문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도 늘 그제사 잠이 깼고, 정신이 또렷이 들었다. 그러면 남겨진 어둠 속에서 나는 훌쩍훌쩍 울었다. 그게 아닌데, 아빠 내 옆에 더 있어도 되는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유독 아빠가 미안해, 하는 말은 늘 그렇게 아프게 가슴에 박혔다. 본데없는 자식처럼 끝간데 없이 아빠를 증오하던 시절에도, 간혹 그 밤처럼 자다 일어나, 그게 아닌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하며 어찌할 바 모르던 날들이 었었다. 아빠와 함께인 시간이 그렇게 짧으리라고는, 다시 잘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안엔 아직도 용서 못한 내가, 용서가 필요한 내가 있다. 잊었다 괜찮다 생각했지만, 간혹 생각날 때마다 가슴에 눈물이 찰랑이는 기억들이 있다. 이제는 그 모두가 생의 일부라는 것, 억지로 지우거나 극복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 그저 때마다 눈물에 잘 씻어 두면 그만인, 때로는 떠오를 때마다 먹먹한 가슴을 견디며 스스로를 용서해야 할 이야기들.

유독 버스를 타고 멀리 떠날 때면 자주, 그런 내가 말을 건다.

인기척을 느낀다. 잠들었던 장군이 스르르 일어나 나를 들여다본다. 그는 이런 아내를 보아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그저 목 뒤로 팔을 뻗어 어깨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머리를 기울인다. 나 역시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어차피 입으로 꺼내면 곧 빛이 바래는, 더 오래 가슴에 두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장군은 다시 잠이 들었다.
나도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발리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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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1. chun 2011/01/26 21:33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어쩜...여기 기록된 지명들은 매우 익숙한 걸. 거의 다 알겠어.
    내가 여행기를 잘 안 읽을 이유를 알아냈는데 그건 바로 처음 본 지명이 너무 많이 쏟아져나와서 읽다가 어느새 피로가 몰려오기 때문이었어.ㅋㅋ 그래서 이 글은 후루룩 읽게 됐어.
    내게 언니는 뭐랄까, 최신의 트렌드와 엣지, 음악과 피아노, 교양과 문학으로 무장 된... 세련된 도시녀의 이미지였는데
    이글에선 언니에게 있는 인간미(?)랄까, 나와 공유될만한 어떤 변두리 정서가 느껴지는 걸. ㅎㅎ

    • Abby. 2011/01/28 10:15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나는 네가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라고 느꼈는데
      얘가 가끔 이렇게 뜨악한 얘기를 하더라 ㅋ

      낯뜨겁게 내가 어딜 봐서 도시녀인 것이냐..
      나는 삼미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일 뿐이야. 그냥 허름녀라고!

  2. 2011/01/27 11:10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이모부 보고싶다..

    • Abby. 2011/01/28 10:14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누나가 형에게 바로 얼마 전에 너와 이모부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ㅎㅎ
      예쁘다는 표현을 '주물러 터뜨리고 괴롭히는' 걸로 하는 악동 이모부였는데도 솔이가 아가 때무터 이모부를 무지 사랑해 드렸다고. 보통의 데면데면한 이모부와 조카와는 달랐다고.

      네가 이모부 보고싶다고 해서 누나 울컥했어. 누나도 보고 싶다. :)

  3. james barrie 2011/01/27 18:31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먹먹하다. ㅜㅠ

  4. 헌_. 2011/01/30 15:59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왜그런지 멀미난다

  5. 2011/02/13 06:51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비밀댓글입니다

    • Abby. 2011/02/14 18:38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반갑습니다, 환영하고요 -
      저도 비밀 댓글을 달고 싶어요 ㅠㅜ 방법을 알고 싶은데 제가 비밀 댓글을 달면 아무도 못 보더라고요 ;;

      와, 프랑스에 계시는군요! 저희는 떼제에 머물러 프랑스 남부에 가요. 시기는 8-9월쯤 될 거고요.
      그 곳에 가는 방법이 파리 경유밖에 없다면 하루이틀 파리에도 있게 될 것 같고요.

      고맙습니다. ;) 평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