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

길 위에/Australia, 2010-11 | 2011/02/19 20:09 | written by Abby.
첫 휴일, 닭도리탕을 해서 피킹(Picking, 과일 따는) 스탭 중 우리 외 유일한 한국인 제제(Jeje)와 나눠 먹었다. 셋이서 닭 일 킬로그램과 잔뜩 넣어 익힌 감자 당근 양파와 밥 한 공기씩에 맥주 한 캔을 끝냈다. 제제가, 누나, 맛있었어요, 저 맨날 혼자 대충 먹다 오랜만에 밥다운 밥 먹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 했다. 함께 밥 먹고 들을 수 있는 말 중 가장 고마운 말이었다. 그러나 제제는 일주일 후에도 함께 밥먹고 설겆이하던 중 같은 대사를 반복함으로써 그것이 정교하게 기획된 아부임을 드러내 나를 쓰러지게 했다. 

다음 날, 장군이 인터넷을 빌리려는 피킹 짝 킴(Kim)을 저녁 같이 먹으며 쓰면 어떻겠냐고 초대했다. 밥 위에 볶은 버섯과 당근, 푸성귀들, 데쳐서 채 썬 미트볼을 돌려 가며 얹고, 그 위에 달걀을 얹은 후 참기름을 두르고 고추장을 넣었더니 근사한 비빔밥이 됐다. 김영하라는 이름을 가진 킴은 아버지가 한국분이라 한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에 가 본 일 없고 한국말도 하지 못하는 인도네시아인이다. 그 날 먹은 비빔밥, 양파 장아찌, 건빵 모두 처음이라며 열심히 이름을 외우며 좋아했다. 

 지난 주엔 홍콩에서 온 첸(Chen)을 위해 불고기를 했다. 밤새 재워 둔 고기를 프라이팬에 올리자 부엌에 들어오는 모두가 무슨 냄새야? 뭐야? 오 마이 갓! 했다. 내게는 고기 요리 중 그다지 선호도 높은 축에 들지 않는 불고기가 정말 국적 불문 모두가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라는 게 실감났다. 첸이 사 온 맥주를 한 병 들고 장군, 첸, 킴, 제제 남자 넷이 우걱우걱 불고기 한 판을 비우며 얘기하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은 재미있었다. 아, 내일 저녁 타이완 아이들이 불고기 재우는 것을 도와 주기로 했다. 

하루는 제제가 저녁을 하겠다고 했다. 제제 괜찮아 우린 둘이고 넌 하나잖아 하고 만류했지만 취사병 출신의 자기 요리를 먹어 보라 했다. 냉장고와 냉동실의 온갖 재료를 잔뜩 넣어 끓인 정체 모를 제제식 요리, 그게 뭐야! 하다가 결국 라면까지 넣어 해치웠다. 제제가 2리터 콜라병에 되는대로 마구 부어넣고 흔든, 장군이, 이게 무슨 커피야! 라고 했던 제제 커피에 칼로 뚝뚝 뜯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비벼(!) 먹는 제제 아포가토도 훌륭했다. 첫 휴가 때 부대에서 연마한 칼질을 엄마께 보여 드리고 싶어 집에 가자마자 냉장고 야채를 꺼내 온 집안에 튀게 한 후 쌍욕을 먹었다는 우리 제제, 그의 요리엔 마력이 있다. 제제는 무조건 간을 쎄게 하면 된다고 했다. 

홍콩에서 온 빈센트(Vincent)를 위해 제육 볶음도 했었다. 빈센트는 우리 여행에 관심이 많아, 어느 날 종일 내 건너편에서 사과 따는 속도를 맞추며 나무를 사이에 두고 여행에 대해 이것 저것 자세히 물었었다. 3월 중 일정이 맞으면 울룰루에도 같이 가고 싶어했다. 그는 타이완 밖으로 나온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밥 먹으면서는 정작 김태희에 대해 자세히 물었고, 장군은 김태희 이제 늙었어, 하는 망발로 빈센트의 팬심에도 김태희와 동갑이기만 하고 생김새는 사뭇 다른 아내의 마음에도 상처를 냈다. 

파스타, 리조또, 해물 떡볶이, 닭죽, 호박죽, 밭에서 딴 과일로 만든 잼과 쿠키와 빵 - 과일을 따지 않는 시간엔 거의 요리를 하고, 음식을 나눠 먹고, 먹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럴 수 있도록 잘 갖춰진 숙소의 부엌이 고맙다. 종일 일한 후엔 나가 떨어질만도 한데, 샤워를 하고 나면 개운해져 즐겁게 부엌에 서는 우리들의 몸도 고맙다. 

장군은 시드니에서 저녁마다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의 요리 동영상을 보는 새로운 취미를 가졌었다. 몇 가지 요리를 연습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가 굽는 스테이크는 특히 발군이 되었다. 블로그에 레서피 게시판을 만들..하고 말하다 내게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시드니에서의 마지막 주말에 우리가 고른  영화는 <남극의 쉐프>였다. 이봐, 우린 남극에 밥 먹으러 온 것이 아냐, 투덜대면서도 니시무라가 해 주는 밥을 낙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그리고 울었다. 

어쩌면, 우리들의 여행은 사람들과 나눠 먹은 밥에 대한 이야기, 밥을 나눠 먹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기껏 밥 해 먹으려고 나왔나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쪽이 좀 더 힘이 세다. 사람은 모름지기 밥에 담긴 마음과 밥으로 얻는 힘, 밥심으로 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일꾼의 체질이 된 몸은 매일 술을 찾는다. 저녁 밥상에서 크어어어 하고 마시는 맥주 한 캔은 보약이다. 그런데 그 보약이 늘 견과 섞은 요거트, 무슬리바, 밥, 과일, 치즈, 초컬릿과 과자로 이어지는 풀코스 폭식을 부르고, 그 즉시 나가떨어져 초저녁부터 잠든다는 게 문제다. 역시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함께다.

지글지글 제육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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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1. 정팔 2011/02/22 17:07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난 밥해먹는게 그렇게 귀찮더라.. 일꾼들의 삶에서 신선한 땀내와 열정이 느껴진다! 장쉐프에게 영화 [줄리&줄리아] 추천 ㅋㅋ

    • Jang. 2011/02/22 17:34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땀내는 신선할 수가 없는 건데,
      애비 잘 자라고 있지?

      나 쉐프 그만둔 지 꽤 됐어. 나 없이 스시 집, 스테이크 집 잘 돌아가고 있는 지 모르겠네. 뭐, 데이빗이라는 한국인 쉐프 한 명 해드로 앉혀 놓고 나왔으니 알아서 잘 하겠지.

      어쩌면 어쩌면 호주에서 수입한 사과, 배, 복숭아 또는 그것들로 만들어진 주스나 가공 식품 중에 우리 손을 거쳐간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

      몸으로 하는 일은 그게 감사해, 내 손을 거쳐간 것, 내가 흘린 땀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 정팔댁 2011/02/22 19:16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내댓글이 왜 여러개가 되었을까 근데 문제는 비번이 곧죽어도 생각이 안나서 지울 수가 없어 아놔 임산부 건망증 회복이안되네 ㅜ장쉡이 삭제해줘

    • Abby. 2011/02/23 19:01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장쉡 대신 내가 처리했어. ㅎ
      방에서 인터넷 안 잡혀서 넷북 들고 나갔다 왔는데
      잠깐 새에 모기 열 방. 나는 모기들이 무서워 진심으로. ㅠㅜ

    • Abby. 2011/02/23 19:04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줄리&줄리아> 한국에서 봤어, 사랑스럽지 않니? 본 애뻐띠!
      여기 사람들이 '장'을 잘 발음 못해서 제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면 <제이미&제이>가 되는 건가? ㅎㅎ 재밌겠다! :)

  2. 새롬 2011/02/23 14:55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저도 열심히 밥을 해먹겠어요ㅎㅎㅎ
    한국 돌아오시면 호주식 요리 해주세요ㅎㅎㅎㅎㅎ

    • Abby. 2011/02/23 18:42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호주식 요리, 깜짝 놀라게 될 거야. 읏흠. 정말 아무것도 없거든! ㅋ

    • Jang. 2011/02/26 06:40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한국 이마트나 롯데마트 이런데서 캥거루 고기를 팔까? ㅋㅋ 당연히 없겠지. 동물원에 있는 캥거루를 잡을 수도 없고.

    • Abby. 2011/02/26 14:35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참, 롬새,

      언젠가 우리가 어디 함께 다녀 와서 다들 지쳐 나가 떨어져있는데 놀랍게도 (ㅎㅎ) 원이가 두부 김치를 해 줬어. 더 놀랍게도, 무지 맛있었어.

      가끔 생각날 때 있어, 원이가 해 준 두부김치.
      한 번 해 달라고 해- 어제 사과 나무 가지 매 주다 말고 두부김치 생각이 났음! :)

  3. james barrie 2011/02/25 15:39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언니오빠..우리는 일주일에 밥 한끼 같이 먹기위해, 같이 살려고 매주 머리싸매고 고민하고 있어. 밥 같이 먹는게 왜 이렇게 힘들고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 되어 버렸을까나. 도시에서 사는건 참 유복하지만 뭐 하나 하려면 엄청난 코스트가 드는 구나. 언니오빠 올때쯤엔 우리도 뭔가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음 좋겠다 ㅋ

    • Abby. 2011/02/25 18:09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그렇구나. 고민 끝에 그 생활이 잘 정리되면 좋겠다, 떨어져 사는 건 힘든 일이니까..

      도시의 삶은 때론 모든 것이 가능해서 극도로 빈곤해지는 삶인 것 같아.
      싫으나 좋으나 일단 몸 대고 살아야 할 곳, 건투를 빈다. :) 곧 보아!

    • 인뎡 2011/02/25 19:33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ㅋㅋ 여기서 우리는 운기인뎡이 아니야 ㅋㅋㅋ 교회 정도로 해석되면 좋겠군혀

      운기인정은 운기의 이직으로 올해부터 붙어사는 중 ㅎㅎ

    • Jang. 2011/02/26 06:31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것들에 관한 제반 사항들이 공유되는 것이 사람들이 '함께' 사는 중요한 출발인 것 같아.

      좋은 '우리'를 만드려고 다들 노력하고 있구나. 함께 하고 있지 않아서 아쉽고 미안하다. 최근에 사진벽만든다고 사진 보내라길래 보냈어. 그렇게 '우리'로 연결되 있는 거라 생각하고 감사했어.

      ^^

      운기 잘 지내냐? 페북 담벼락에 글이라도 한 번 남겨야겠다.

    • Abby. 2011/02/26 14:36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그렇구나 ㅎㅎ 그렇다면 더 반가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