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의 모든 노동을 마쳤다.
앞으로 일 년간 일은 없다. 앗싸.
그 간 벌고 쓴 호주에서의 재정을 모두 정리했다.
호주 입국 직전 갑작스런 장군의 뎅기열로 쓴 병원비와 요양 생활비, 호주 생활 초반 세 주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까먹기만 했던 살인적 생활비, 또 그 후 다섯 달 동안 매달 팔백 불의 방세를 비롯한 생활비를 충당하고, 예상에 없이 불가피하게 지출했던 몇 차례의 몫돈을 제외하고도, 기대했던 것보다 약간 더 많은 돈이 여행의 몫으로 고였다.
기이한 방식으로 채워진 우리의 '살림'들을 잊을 수 없다.
호주에 도착하고 처음 묵은 백패커 숙소의 "Free stuff" 박스에 놓여 있던 정확한 사이즈의 운동화, 혹시나 하고 들른 주말 시장에서 홀로 다른 녀석들의 반 값도 안 되는 믿을 수 없는 가격으로 우리를 기다렸던 자전거, 크리스마스 음악회를 앞두고 출근길 도로 한가운데서 발견한 - 동료들이 "말도 안 돼!"하고 외쳤던 고급 브랜드의 - 블라우스, 선글래스를 잃고 낙담하던 일주일 새 슝슝슝 새로 생긴 세 개의 선글래스들, 인터넷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한 친구가 선뜻 건넨 모바일 단말기.
그 외에도 우리에게 이 곳에서 필요했던 수많은 살림들은 납득할 수 있는 범위, 합리 안에서의 믿음에 익숙한 우리들을 당황시키는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채워졌다.
'타이밍'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지인 가게의 일자리를 찾아 인터넷 지원서를 넣던 어느 날, 장군은 엉뚱하게 쉐프를 구한다는 한 레스토랑에 혹시 키친 핸드는 필요하지 않느냐 메일을 보냈다. 쓸데없이 시간 낭비한다는 내 핀잔이 무색하게, 삼십 분 후 그 곳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마도 그 날 자리가 생겨 아직 구인 광고도 내지 않은 듯 했다. 한 시간 후 바로 면접을 보았고, 출근이 결정되었다.
내겐 뜻밖의 서울 발 멜번 진행 프로젝트가 생겼다. 호주에 있는 동안 현지 프로젝트가 생긴 것만으로 회사에선 일복이 터졌구나고들 했다. 그런데 멜번 이후 호주를 떠나기까지의 시간이 고민스러웠다. 아예 떠나 멜번 근교의 농장을 찾기에도, 익숙한 시드니로 돌아와 일할 아르바이트를 찾기에도 한 달은 짧았다. 이후에 대한 결정을 미룬 채 일단 프로젝트를 맡기로 하자마자, 우리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하던 쉐어메이트의 사정으로 선택의 여지 없이 일찍 떠나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농장에 갈 운명이로군. 마치 누군가 기다렸다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웬걸, 호주엔 그 여름 물난리가 무척 심했다. 농장이 밀집된 퀸즐랜드가 가장 피해가 커, 수많은 농장 인력이 모두 다른 주로 몰린 상황이었다. 막상 농장행을 정하고 정보를 찾다 보니 모두가 농장 일을 구하기 어려운 해라고 했고, 몇 군데 찾아 들어간 큰 농장과 농장 인력 전문 에이전시 홈페이지엔 올 해 더 이상 채용 계획이 없으니 연락하지 말라는 공지가 크고 붉게 떠 있었다. 두세 군데 이메일을 보내 두긴 했으나 연락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친구들도 모두 프로젝트만 잘 마치고 시드니로 돌아오라 했다.
멜번에서의 일주일, 장군은 그 간 주방 일을 하며 쌓인 피로도 풀 겸 직접 다니며 농장도 알아볼 겸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프로젝트의 사정이 급해졌고,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에겐 쉼이 필요했고, 또 그의 휴가에 우리들의 이후 한 달 일정이 달렸으므로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 보려 했으나, 장군은 첫날 밤 초죽음이 된 나를 보고 결국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하루 다섯 시간 잠자며 뛰어다니는 날들이, 나중 일을 생각할 겨를 없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한 농장이었다. 맙소사,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세 곳에서나 연락이 왔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단 하루의 손실도 없이 바로 그 중 한 농장으로 향했다.
농장행을 택하며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더럽고 좁은 부엌과 화장실과 방, 어디에나 들끓는 모기, 스탭을 사람 취급도 않으며 임금을 떼먹는 매니저 등 최악의 상황을 각오했다. 그러나 보수가 좀 적었을 뿐, 모든 것이 우리의 기대보다 훨씬 훌륭했다. 농장 생활 말미에 다른 농장의 일꾼들이 우리 과수원으로 파견을 나왔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선택지에 놓였던 곳 중 하나였다. 알고 보니, 그 농장은 우리가 각오했던 예의 모든 조건을 갖춘 데다 작황도 좋지 않아 억지로 일을 쉬는 날도 많다고 했다. 얘기마다 가슴을 쓸어내릴 것들 뿐이었다. 결국 그 중 몇 명은 견디지 못하고, 보수가 더 낮음에도 불구하고 이 쪽 농장에 자리가 나자마자 옮겨 왔다.
- 기억하렴, 너희들이 어떤 돌봄을 받아 왔는지.
마치 누군가 계획하고 준비한 것처럼
늘 모든 것이 정교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실은 그것이
우리가 특별한 존재거나 지금이 특별한 시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를 의지하는 모든 이들에게의 보살핌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인생이, 일천한 경험과 작은 인간의 깜냥 안에서 다 설명되는 것이 아니란다 얘야, 하고 타이르듯.
생각해 보면 우리에겐 하나의 결정 앞에 수많은 조언과 선택지가 놓였었다.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고 불확실성은 두려웠기에, 여차하면 잡을 수 있는 많은 것을 손 닿으면 닿을 곳에 두었다. 불행히도 잦은 경우, 그렇게 준비된 많은 잔가지들이 시야를 흐렸고, 최선의 것을 비켜 다른 것을 잡게 했다. 더욱 두려웠으므로, 다음 번엔 더 많은 것을 준비하고 고려했다. 더욱 헛갈렸다. 악순환이었다.
우리가 습관대로 무엇을 어찌할 수 없는 낯선 땅에 떨어지자,
차돌처럼 매끈하고 단단해 보였던 선택지나 조언들 역시 시나브로 사라졌다.
그러자 자주, 우리 둘이 함께 인지할 수 있는 단순하고 분명한 하나의 최선이 앞에 보인다.
물론, 구했으나 얻지 못한 것도 있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 끝까지 열리지 않았던 장군의 개발자 프로젝트가 그랬다. 우리들의 여비보다 더 많이 벌어 쟁이길 원했던 - 아직 싱글인 동생들의 결혼에 보탤 만큼, 들고 나온 전세 빚을 갚아 버릴 만큼 많은 - 돈 같은 것들도 그랬다.
사람. 돈. 물건. 정보. 여행의 길. 혹은 다른 그 무엇.
필요한 것은 주실 것이다.
주시지 않은 것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부지런히 준비하리라 생각했다. 최선을 다 해 찾고 구하고 두드리려 한다.
그러나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많은 곁길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열리지 않은 것, 구해지지 않는 것엔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한다.
나는, 새를 먹이고 들풀을 입힌단다.
인간인 너도 떡을 달라는 아이 손에 돌을 올려놓을 리 없는데, 내가?
하나님이란 신은 살아 있고 믿을만한 존재라 말하면서도
그 사실에 우리들의 하루를 맡기는 것이 여전히 우리들에겐,
눈을 질끈 감아야 하는 실험이다.
앎과 삶, 말과 행동의 부조화 - 의심하고 회의할 때면 눈 앞에 보였던 이상한 꽃, 자카란다
그 불편한 틈새를 다른 것으로 꾸역꾸역 메우면서
그것을 '합리적인 신앙' 이라 생각해 온 두 녀석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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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