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삶에 속는 것이 무언지 안다고 생각했던 십대의 가슴을 때린 시의 작가,
푸시킨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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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으니 출발 눈 뜨니 도착이었을만큼 기차에서 밤새 푹 잔 덕분인지 이 곳이 우리와 잘 맞는 덕인지
기차에서 내려 맞은 새벽 공기는 모스크바보다 한결 부드럽고 기분도 상쾌하다. 

자욱한 안개에 싸인 아침의 뒷골목, 
마치 아침마다 우리 동네를 도는 과일 행상처럼 생긴 빵 행상 차에서 산 크로아상 하나씩을 들고
역에서 가까운 소울 키친 Soul Kitchen 호스텔의 문을 다짜고짜 두들겼다. 
예약도 없이 체크인 시간보다 네 시간이나 앞선 이른 아침 쳐들어온 이방인을
스탭 알란Alan이 싫은 내색 없이 익숙하게 맞아 준다. 

예쁜 방과 깨끗하고 아담한 부엌, 이곳저곳에 놓인 귀여운 인형들과 벽의 펑키한 그래피티,
그 동안 다녀간 이들의 고향에 깃발이 빽빽히 꽂힌 세계 지도와 세계 지폐들, 무엇보다, 
지친 채 막 도착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커다란 "쉬도록 해 RELAX" 뾱뾱이 보드.

"이건 나중에 우리집에 꼭 만들어 놔야겠어!"


빙긋 웃을 일 많은 곳이다. 
다시금 지옥에서 천국으로 온 듯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깔끔한 호스텔 - 게다가 가격도  싸다!

짐을 풀고 아침의 넵스키 대로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를 걸었다.
넵스키 대로는 네바강과 닿은 페테르부르크를 가로지르는 큰 길답게 '네바강의 길'이라는 뜻이다.
복잡한 출근 시간의 큰 길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모스크바에서처럼 숨막히는 느낌이 없다. 

여기가, 페테르부르크구나. 

붐비지 않는 아름다운 길을 휘적휘적 것는 것만으로도 때로는 가슴이 뻥 뚫린다.
넵스키대로 시작부터 에르미타쥬 앞 광장까지 몇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크게, 크게, 넓은 보폭으로 오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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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 끝이라 몹시 춥고 안개가 심한 날이었지만, 
뿌연 공기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카잔 성당과 피의 사원은 안개 덕에 더 경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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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스키 대로를 따라 이어지는 도시의 모습은 무척 세련됐지만
동시에 오래 전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만큼 고풍스럽다.
깨진 유리창 하나 함부로 갈지 않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금 간 건물의 벽을 메꿔 가며
물려 받은 것 그대로에 조심조심 당대 사람들의 삶을 얹은 덕이다.

오랜 것을 개량해야 할 허름한 대상으로 여겨 운동까지 벌이며 말끔히 허물고 치운 후
그 자리에 세운 화려하고 커다란 것들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내 고향과는 다른 지혜다.

진공된 유리케이스에 엣 것을 박제하면 손쉽고 깨끗하게 관리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썼다는 하숙집에 2009년의 누군가가 여전히 먹고 잘 수 있고
푸시킨이 결투 전 들렀다는 까페에 지금도 애인의 배신으로 가슴 뜯는 청춘이 머물도록 하는
이 도시를 사랑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방법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세월이 깃든 이 도시를
유네스코가 인류의 유산으로 인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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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금방 지났다.

여름밤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로 유명한 페테르부르크엔
대신 겨울에는 오후 네 시만 되어도 완전한 어둠이 내린다.

여러 모로 지금이 러시아를 여행하기 좋지 않은 시기라는 말에
이른 어둠으로 초저녁만 되어도 일정을 접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밤새도록 해 지지 않는 낭만적인 하얀 밤이 여름의 선물이라면
오후에 즐기는 네바 강변의 이런 멋진 야경은 겨울의 선물인 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름다운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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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1. 조기성 2010/12/24 11:33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진짜 분위기가 확 다르네~~ㅋㅋ
    모스크바 시쳇말로 지랄맞네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