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일 시작하고 몹시 괴로운 것 중 하나는
일을 하려면 좋든싫든 다시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거다.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 무슨 얘기들이 오가는지.
포털의 메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미디어의 헤드라인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제사 아주 조금 숨 쉬고 생각할 수 있게 서늘해진 뇌가 다시 뜨끈하고 질척해지는 느낌이다.
정말이지 내겐 거리를 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 같은데, 너무 일렀다는 생각이 든다.
굶어 죽더라도 서울의 일들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지난 주에 있었던 두 죽음.
행복전도사라 불렸던 한 분의 부부 동반 자살과, 장애인 아들을 둔 아버지의 죽음.
오래 전 이은주라는 배우가 죽었을 때 나는 꽤 오래 시달리며 잠 못 들었었다.
막 회사 생활 시작하면서 삶의 지형이 온통 흔들리는 성장통을 겪던 시기라 그랬는지
나와 동갑인 스물 다섯 꽃 같은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게 한 상황이란 무얼까, 잠 못 이루고 생각하며 떨었었다.
내 인식에는
그 사건을 기점으로 자살 뉴스가 시나브로 일기예보만큼이나 흔해졌고
게 중 가끔씩 유난히 나를 흔드는 자살의 소식들이 있었다.
지난 주의 두 죽음도 그랬다.
세상을 저버린 그 분들의 지독한 상황도 몸서리쳐지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뜬금없이,
이런 식의 논의가 곧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심란해졌었다.
그런 바보같은 걱정을 왜 하게 됐을까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뒤의 분의 상황이 누구든 그 선택을 납득할 만큼 선명하고 가슴 아파서 그랬던 것 같고
그보다는 앞의 분이 남기신 유서가 너무나 담담하고 쿨하셔서 그랬던 것 같다.
자살이나 유서에 '쿨'하다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몹시 저어되는 일이고, 그 분의 그 간의 고통이란 내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그 분이 남기신 메시지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어쩔 수 없이 '미련없이 깔끔하고 쿨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완전 건강'하셨다는 남편 분의 선택에 대해서는 더더욱.
칼로 베듯 날카로운 옳고 그름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죽을 용기로 살면 되지, 라는 잔인하고 무지한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전히,
자살은 정상적인 죽음의 방식이 아니고, 선택 가능한 옵션의 하나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이 전제를 흔드는 논의, 자살도 정상적인 선택지의 하나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먹물들의 학문적 고찰 따위의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식 선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하지.
자살에 '존중'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고인을 존중하고 애도하려는 뜻인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자살조차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어떻게 하지.
그게 재앙이고
그게 지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한국 밖에 나와 느끼는 점 중 하나는
우리 나라 미디어들이 참 자살에 관한 소식을 자주, 자세히 다룬다는 점이다.
매일 들여다보는 시드니의 신문들 역시 선정적인 헤드나 소재를 안 찾는 건 아니지만
각계각층 자살의 이야기를 매일같이 지면에 얹지는 않는다.
아.
정말이지 어쨌거나
자살은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다.
세계 1위의 자살률이라는 건 정말이지,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지 않을까?
살아 보면 안 될까, 조금만 더 견뎌 주면 안 될까, 방법을 찾아볼 수 없을까, 라고 애원하고 싶은
살아 남은 (자살 뉴스를 보면 나는 내가 '살아 남았다' 고 느낀다) 자의 심정은
정말이지 무기력하다.
일을 하려면 좋든싫든 다시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거다.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 무슨 얘기들이 오가는지.
포털의 메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미디어의 헤드라인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제사 아주 조금 숨 쉬고 생각할 수 있게 서늘해진 뇌가 다시 뜨끈하고 질척해지는 느낌이다.
정말이지 내겐 거리를 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 같은데, 너무 일렀다는 생각이 든다.
굶어 죽더라도 서울의 일들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지난 주에 있었던 두 죽음.
행복전도사라 불렸던 한 분의 부부 동반 자살과, 장애인 아들을 둔 아버지의 죽음.
오래 전 이은주라는 배우가 죽었을 때 나는 꽤 오래 시달리며 잠 못 들었었다.
막 회사 생활 시작하면서 삶의 지형이 온통 흔들리는 성장통을 겪던 시기라 그랬는지
나와 동갑인 스물 다섯 꽃 같은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게 한 상황이란 무얼까, 잠 못 이루고 생각하며 떨었었다.
내 인식에는
그 사건을 기점으로 자살 뉴스가 시나브로 일기예보만큼이나 흔해졌고
게 중 가끔씩 유난히 나를 흔드는 자살의 소식들이 있었다.
지난 주의 두 죽음도 그랬다.
세상을 저버린 그 분들의 지독한 상황도 몸서리쳐지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뜬금없이,
자살 또한 삶의 마무리로 존중할 만한 방식 중 하나일 수 있는가.
이런 식의 논의가 곧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심란해졌었다.
그런 바보같은 걱정을 왜 하게 됐을까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뒤의 분의 상황이 누구든 그 선택을 납득할 만큼 선명하고 가슴 아파서 그랬던 것 같고
그보다는 앞의 분이 남기신 유서가 너무나 담담하고 쿨하셔서 그랬던 것 같다.
자살이나 유서에 '쿨'하다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몹시 저어되는 일이고, 그 분의 그 간의 고통이란 내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그 분이 남기신 메시지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어쩔 수 없이 '미련없이 깔끔하고 쿨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완전 건강'하셨다는 남편 분의 선택에 대해서는 더더욱.
칼로 베듯 날카로운 옳고 그름에 대해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죽을 용기로 살면 되지, 라는 잔인하고 무지한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전히,
자살은 정상적인 죽음의 방식이 아니고, 선택 가능한 옵션의 하나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이 전제를 흔드는 논의, 자살도 정상적인 선택지의 하나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먹물들의 학문적 고찰 따위의 차원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식 선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하지.
자살에 '존중'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서 고인을 존중하고 애도하려는 뜻인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자살조차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어떻게 하지.
그게 재앙이고
그게 지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한국 밖에 나와 느끼는 점 중 하나는
우리 나라 미디어들이 참 자살에 관한 소식을 자주, 자세히 다룬다는 점이다.
매일 들여다보는 시드니의 신문들 역시 선정적인 헤드나 소재를 안 찾는 건 아니지만
각계각층 자살의 이야기를 매일같이 지면에 얹지는 않는다.
아.
정말이지 어쨌거나
자살은 정상적인 선택이 아니다.
세계 1위의 자살률이라는 건 정말이지, 그냥 두고 볼 일은 아니지 않을까?
살아 보면 안 될까, 조금만 더 견뎌 주면 안 될까, 방법을 찾아볼 수 없을까, 라고 애원하고 싶은
살아 남은 (자살 뉴스를 보면 나는 내가 '살아 남았다' 고 느낀다) 자의 심정은
정말이지 무기력하다.
'머무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대답은 쿨하게 (3) | 2010/10/29 |
|---|---|
| 최이든, 생애 첫 썩소 (4) | 2010/10/11 |
| 죽음의 방식에 대해 (0) | 2010/10/11 |
| 우리 아가 (8) | 2010/10/04 |
| 왕만두가 태어났습니다 (5) | 2010/09/25 |
| 백수 감동 (9) | 2010/09/23 |

그런데, 그래서,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