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를 마치고 후지르로 돌아가는 길의 일이었다.
부르부르, 낮부터 조금씩 시동이 말썽이던 차가 산 속에서 완전히 멈췄다.
운전사와 가이드 소냐의 낭패한 표정에서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밤이 빠르게 내려앉는 숲 속, 다섯 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미 사위가 어둑어둑하다.
잘 하면 산에서 야영도 해 보겠구나. 시베리아 야영이라니, 제대로 혹한기 훈련이야.
러시아에선 차 고장 나면 엔진에 보드카를 넣는대. 차가 술이 당기는 거야 오늘.
푸훗. 웃는데
마주 보이는 건너편 앞자리의 할("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의 야비한 잭 블랙처럼 생긴)이 짜증을 터뜨린다.
- 휴우, 이 봐. #**#에서라면 이럴 때 어땠을 것 같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제길.
저 아이들, 또 시작이로구나.
여기서 만나는 모든 것들, 너희 집 그 곳이나 우리 집 서울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게 당연해.
여긴 러시아고, 작은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꼬박 한 나절을 산 넘고 물 건너 들어온 알혼이니까.
좀 더 시간을 지체하면 보상이라도 청구할 기세로 으르렁거리던 그들에 아랑곳 않고
한참을 본네트 저 너머에서 씨름한 운전사 덕분에 무사히 후지르에 도착했다.
먼저 내려 문을 열어 주고 일일이 내리는 이들을 에스코트하는 웃는 낯의 그에게
누구 하나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이라도 남기려 기다리던 우리 뒤로
마지막으로 나오던 대만 커플 쯔잉과 웨이탕만이 예의 명랑한 목소리로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best guide, best driver ever>
알혼을 나와 마지막 밤을 보낸 이르쿠츠크의 호스텔엔 다음 날 또 알혼으로 들어가는 새 여행자들이 있었다.
그 간의 러시아 여행이 어땠냐는 물음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우리와 동행한 유러피안들은
러시안들의 서툰 영어와 횡단 열차에서 경험한 여행자에 대한 관심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냈고
알혼에 대해서도 머리를 감을 수 없었던 불편함과 냄새 나는 화장실(‘자연분해식’이라고 쓰여 있던),
비포장 도로에 꿍꿍 머리 찧는 거친 운전, 차가 멈추기도 하는 기막힌 상황들을 먼저 이야기했다.
어쩌면 그런 불만이 도드라진 건 사흘을 꼬박 투자한 바이칼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흔한 전망대 하나 없이, 아무런 꾸밈 없이 덩그러니 크기만 한’ 바이칼 앞에서
그들은 간혹 다른 호수와 다른 아름다운 절경을 이야기하기도 했으므로.
“시베리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를 찾은 진짜 “파리지앤”들은 물론이고
이후의 여정에서 만난 유러피안들 또한 간혹 그런 기색을 비췄다.
- 모스크바, 좋긴 해, 그런데 아무래도 OOO 가 더…
- 에르미타쥬가 훌륭해? 물론… 훌륭하지. (그런데 OOO에 비하면…)
최고의(것이라 해석된) 풍경과 예술을 내 집 정원처럼 향유하며 자라
역설적으로 높디 높아진 감동의 역치閾値 탓일까,
팔순 노인의 혀 끝처럼 무감해 보이는 가슴과 권태로워진 감각은.
사람에 따라 여행지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얼마든지 갈릴 수는 있으나
불편한 것은 ‘존중'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유러피안들에게 러시아는 어쩌면 한 수 아래로 적당히 내려 보기 좋은 존재,
아시아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유럽에 끼워 주기는 싫은 계륵鷄肋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본질적으로 ‘관광 당하는’ 대상에 대해 폭력적인 성격을 띌 수밖에 없고
머무는 곳의 맥락에 대한 이해와 존중 없는 (특히나 폄하 섞인) 감상은 난도질이 된다.
자기도 모르는 새 칼을 휘두르거나 떠났으되 여전히 자기 안에만 갇힌 채 머물지 않으려면
그러므로 여행 중에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돌아보아야 한다.
대부분 러시아에서 남아시아 일주로 이어진다던 유러피안들의 장기 여행 루트가 문득 생각났다.
그들이 기대하고 그리는 아시아 또한
턱없이 가공된 어느 다큐 속에서 만날 법한 개량의 대상이거나
‘이그조틱한’ 매력이 가득해 ‘오리엔탈리즘적 욕망’을 충족하는 세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 ‘존중’받지 못한 것은 러시아와 러시안들만이 아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그들과 동양인 사이에는 설명하기 싫은 묘한 벽이 섰다.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거나, 적절하지 않은 순간에 등을 보인다거나 하는
별 것 아닌 행동으로 시작된 그들의 그룹짓기와 은근한 무례함이 점점 거슬렸다.
장군은 그저 '누구나 그렇듯 비슷한 생김새가 익숙하고 우리는 그들에게 낯설어서 그런 것’이라 했으나
그냥 무시해 just forget it 하던 쯔잉과 웨이탕처럼, 그 역시 찜찜한 기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품위에 살고 명예에 죽는 귀족의 후예들답게
타인과 타 문화 안의 품위를 발견하고 존중하는 태도 역시 함께 몸에 배었다면 좋았을 텐데
눈에 보이는 반듯한 예의 너머의 사정이 정중히 먼저 청하던 악수와 꼭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한편
나를 존중하지 않는 자들 앞에서 분노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스스로 단단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보다 담담하고 당당한, 상대의 태도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남편에 비해 나는, 아직 멀었다.
이질적인 문화에 속한 개인과 개인의 만남은
원치 않으나 때로 문화 대 문화의 만남이 된다.
하여 상대에게 읽히는 것이 다분히 개인적인 맥락의 성향과 습관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쉽사리 그가 속한 국가나 문화의 집단적인 특질로 비약되곤 한다.
그렇다고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헛똑똑이 나는 이렇게 ‘유럽 애들은 참’ 하며 그들을 대충 묶음 처리한다.
그들이 유러피안이라 그랬는지, 우리처럼 아직 철이 없어 그랬는지, 돈 좀 있는 전문직(하나같이 그랬다)들이라 그랬는지, 전적으로 개인적인 성향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변수가 있음에도.
일말의 실망감이 그네들의 사회에 대해 가졌던 부러움까지 덜어낸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나의 ‘얄팍한 감동의 역치’와‘우리가 갖지 못한 어떤 것’들이 그렇게 불공평하다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주어진 선물이 다를 뿐.
몇 사람과 보낸 짧은 시간 후 스민 부러움과 또
몇 사람과 보낸 짧은 시간 후 스민 실망이란
던져진 동전 한 개만큼의 가벼운 무게.
여러 가지 생각을 남기고
이르쿠츠크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모스크바로 움직여야 할 시간,
어느 새 떠나온 날보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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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비행기 날개와 창공에서 내려다 보는 구름과 땅은
여행을 떠난 누구나 찍는군요....ㅋㅋㅋㅋ
동유럽의 구석진 나라들을 여행하고 픈데
책이나 블로그에서도 자료를 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체코와 오스트리아, 헝가리 자료들은
똑같은 곳에 대한 엇비슷한 감상으로 흘러넘치는데도.
슬로바키아나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 끝자락에 붙은 작은 나라들은
여행자들도 별로 찾지 않는가 봅니다.
그런 구석지고 변방의 '곶(데리다)'을 가려니 참~~
"거기를 뭣하러~?"라는 말꼬리 흐려지는 물음들에
저도 씨~익 웃으며 그저 머쓱합니다.
그래도 가보고 싶은 걸 어떡하라고....ㅋㅋㅋ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이 전세계를 뒤 덮고 있듯
염치없음과 몰상식도 세계적인 트렌드인가 보내요...ㅋㅋㅋ
와, 저희도 꼭 가 보고 싶은 나라들이예요,
루마니아 근처의 나라들이요.
누구나 말하는 정보 많은 나라들은 실은 안 가 봐도 훤한 걸요.
준비 잘 되어 가세요? 떠나기 전 준비하는 즐거움도 크시죠?
다녀 오시면 저희에게도 정말 정보 나눠 주세요!
저희도 발칸반도 몇 나라는 가 볼 생각이거든요. 물론 빨라야 내년 여름 정도나 되어야겠지만요.
von voyage! :)
명승지나 유명한 건물, 볼거리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미술관을 중심으로, 그것도 유명한 화가들이 아니라, 이름없는 화가들의 그림 몇 점을 보러 떠납니다. 그 사이 일어날 일들은 덤이라 생각하구요. 느리고 천천히, 가다 멈추다 서다를 반복하며 초기 일정과 미술관 몇 곳만 생각하고 떠납니다. 정보가 될 진 모르겠지만, 물으시면 그런건 대답해드릴 수 있을 듯 합니다.
독일을 들를지 아직 갈등입니다. 옛 동독지역쪽 인데 베를린에 있는 케테 콜비츠 박물관과 드레스덴, 그리고 뵐레(서경식 선생의 발자취)를 너무 가보고 싶은데.. 우째 될런지요?
준비하는 즐거움, 아직 만끽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티켓만 구해둔 상태고, 1월 넘어가서 본격적으로 준비하지 싶어요. 지금은 그동안 묵혀 두었던 책들 짬짬히 읽으며 서서히 발동만 걸고 있습니다......ㅋㅋㅋ
좋은 여행 기대됩니다 간사님!
미술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사실 유명한 미술관에 있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은 어쩌다 거기에 있을 뿐,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이름 없는 예술가들의 작품 감상이 더 여행자에게는 가치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근데 간사님 여행 기록은 어디에 하실 생각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