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횡단하자, 어때?   

남편의 아이 같은 말에 그게 뭐야, 하며 어이 없이 웃던 나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듯 곧 그의 말대로 
카메라를 들고 열차의 끝에서 끝까지를 신나게 쏘다녔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열차는 종류가 무척 많다.
그 중 우리가 탄 것은 “로시야 Россия”라는 이름이 붙은 1호 열차.
말하자면 시베리아 횡단 열차 중 대표격인 차편이다.
 
그러니 워낙 좋은 열차인 데다
객차당 두 명의 차장이 매일 청소기까지 돌리며 관리하는 덕에 열차 안은 집보다 깨끗하다.
낡디 낡은 중국 차 여행 경험이 있는 엄마는 후에 사진을 보고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 하셨더랬다.
 
대신 가격은 예산보다 좀 더 비쌌다. 1인당 1만 루블 남짓 - 우리 돈 40만원 정도. 
'일단 저렴한 것'을 원했지만, 비수기에 원하는 날짜에 이동하려니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 명이 머물렀던 우리 방 ‘꾸페Купе’의 풍경 – 우리가 어지른 짐을 지우고 보아야 깔끔하다.


좌석을 오른쪽처럼 의자로 만들어 둘 경우 남자 둘이 마주 앉으면 간신히 무릎이 닿지 않을 정도의 좁은 너비가 갑갑한데, 지내면 지낼수록 방이 점점 넓어진다 – 동선, 수납, 거울 등 최적의 설계를 자랑하는 신기한 공간! 

 
 

객차 사이사이에는 
차장들의 방이 있어 간단한 차, 다과, 컵라면을 사 먹을 수도 있고
언제나 물이 끓는 러시아식 물주전자 커다란 ‘사모바르’에서 더운 물을 얻을 수 있다.
열차를 타기 전엔 보통 40도에 육박하는 열차 안팎의 온도 차이 때문에 
창문이 성에로 가득하면 아무것도 못 보고 어쩌지, 걱정했었는데 
괜한 생각이었다 – 단 한 점의 성에도 발견할 수 없는 훌륭한 통풍 시스템. 

  

열차의 식당칸은 경험 삼아 딱 한 번 이용했다.
지방 중소 도시 트렌드세터들이 모여 함박스텍 썬다던 경양식집 같은 정겨운 인테리어는 그렇다 치고

뭐랄까 교통 수단이 연계된 집의 먹거리가 비싸고 맛없다는 건 전세계 공통의 룰인 것인가.
덕분에 돼지 기름에 순무를 동동 띄운 육개장스러운 러시아 스프 보르시борщ를 맛보았다.
비누 냄새 나는 타이의 똠양꿍이나 역시 독한 중국의 훠궈도 좋아하는 내겐 OK였던 보르시마저도
장군은 비릿해서 먹기 힘들다며 모두 양보했다. 오, 스빠씨바. 


 
 

객차 사이사이에 붙은 열차의 화장실은 아주 작지만 깨끗하다.
수도는 꼭지를 꾹 누르면 일정한 양의 물이 나오고 끊기는 시스템이지만, 
세수하고 이 닦는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다만, 머리 감고 샤워하긴 어렵다.
 
떠나기 전 어느 블로그에서 
원한다면 물컵으로 물을 받아 머리 감고 심지어 샤워도 할 수 있다며 자랑처럼 적은 글을 봤었다.
실제로 보니 애초에 그 정도 세면을 감당할 수 없도록 설계된 곳인데 
누군가 억지로 그렇게 씻은 뒷감당은 불가피하게 모든 사람이 나누어 져야만 한다.
물도 모자라고, 뒷정리를 아무리 잘한들 한 번 물벼락 맞은 화장실을 깨끗이 원상복구할 수도 없으므로.
 
함께 사는 길보다 일단 내가 편한 길을 도모하는 것이 익숙한 어느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집 밖에서도 샌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은, 예상보다 좀 더 부끄럽다.
 
주로 어르신들이 누워 주무시거나 책, TV 따위의 소일을 즐기던 고요한 2인실 룩스Люкс,를 지나,
우리가 묵은 4인실 꾸페Купе를 지나, 다시 룩스를 지나, 식당칸을 지나 
끼득끼득 뽈뽈뽈뽈 열차 안을 거침없이 활보하던 중
6인실 쁠라쯔까르따Плацката 에 들어가다 말고 멈칫, 했다. 
 
방과 복도 별도의 구분 없이 오픈 된 객차 한 칸에 침대가 즐비한 쁠라쯔까르따의 문을 벌컥 여는 순간
타인의 아주 개인적인 생활공간을 침범했다는 당혹스러운 느낌이 우리를 와락 덮쳤고
객차 주민 아니면 드나들 일 없는 그 공간을, 구경할 의도로 들어선 것이, 어쩐지 객쩍어졌다.
 
거기에 문을 열자 훅 끼쳐 오는 젊은 남자들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일시에 우리에게 쏠린 수십 개의 눈에 담긴 호기심과 경계심과 간혹의 적대심은
쉽게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카메라를 꺼내기는커녕 섣불리 “안녕하세요”라 말을 먼저 건네지도 못한 나는,
어색한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장군 팔을 꽉 잡은 채 걸음 바쁘게 객차를 빠져 나왔다. 
 
쁠라쯔까르따가 무슨 타이타닉 3등칸 같은 공간이 아니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가 탄 열차의 쁠라쯔까르따엔 반항기 충천한 눈을 한 젊은 남자들이
고요하게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앉아 있었다. 
 
어쩌면 그네들은 다른 러시안들이 우리에게 그러했듯
‘이스비니쩨(실례합니다)’라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얼음 같은 표정을 쨍, 하고 깨뜨리며 방긋 웃었을 지도 모르는데.
순간적인 편견과 두려움이 그대로 드러났을 이방인의 표정과 굳은 몸짓이
어쩌면 그들에게 일말의 모욕감을 주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어떤 찰나에 인간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말보다 선명하게 서로 주고 받는 것이므로.
 
그것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으나, 실은 아직도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방인의 방문을 '침범'으로 여기는 듯한 눈빛을 만났을 때
어디까지 뚫고 들어가도 좋은 걸까 - 용기와 무례의 미묘한 경계.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열차 안을 킁킁대며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열차를 도는 우리에게 킁킁 촉수를 세우고
우리는 열차 밖을 넋 놓고 보고, 그 곳 어떤 이들은 지나는 열차를 넋 놓고 보고 -
서로에게 없는 다른 것을 구경하고 구경 당하기는, 사는 내내 일어나는 일상다반사.
 
방문을 열고
우리들의 좋은 룸메이트 알렉과 로디온이 내민 보드카를 홀짝, 들이키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친친(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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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1. 조기성 2010/10/15 09:20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40만원씩이나 하는군요......우와~~

    '킁킁대며 돌아 다녔다'라는 말,
    무척 전위적으로 들리는데요.....ㅋㅋㅋㅋㅋ

    낯섬과 마주하는 거
    참 많은 용기가 필요한데
    전 좀 즐기는 편이거든요.
    그래서,받음직하고 들음직하게 다가가는 게
    늘 서툴러서 여럿 곤란하게 한 적이 있는거 같아요.

    편견으로 재단하지 않고 섣부른 판단없이 타인을 대하는 건
    늘 어려운 일인 듯 해요.

    • Abby. 2010/10/15 14:14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네, 킁킁대며 돌아다녔지요. 어딜 가나 처음엔 킁킁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시드니에선 아직도 매일매일 미심쩍은 표정으로 킁킁대며 다니는 기분이네요. ㅎㅎ

      꾸페 가격은 40만원 정도였는데 러시아란 나라는 기차표 가격이 일정하지 않고 파는 창구마다 사람마다 시간마다 다르다 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저희는 좀 비싸게 산 것 같았어요. 물론 쁠라쯔까르따(6인실)는 훨씬 저렴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