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안녕, 이르쿠츠크!

길 위에/Russia, 2009 | 2010/03/10 20:20 | written by Abby.

어디로 가는지 묻는 기차 안 사람들에게 
“일윽꾸흗쓱끄”라고 발음해야 간신히 이해시킬 수 있었던 그 곳, 발음 어려운 이르쿠츠크는 
블라디보스톡과 모스크바의 중간쯤, 말하자면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어,
누군가를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리기 딱 좋은 곳이다.
 
이광수의 <유정>에 등장하는 최석은 세상을 피해 숨어들어간 최후의 공간으로 이르쿠츠크를 택했고
100년 전, 부패한 러시아 차르는 반동분자 데카브리스트 혁명 주동자들을 이 곳으로 몰아넣었다.
 
세상사 참 재미있어,
동지애 충천한 지식인, 예술인들이 통째로 유배되어 오도가도 못하고 뿌리를 내린 덕에
아스팔트를 비집고 나오는 들풀처럼 미술관과 예술 극장과 대학이 하나 둘씩 일어났고
유배의 피바람이 불고 난 후 이 도시는 아예 결이 다른 ‘시베리아의 파리’로 다시 태어났다.
 
지식인도 예술인도 아니지만 조금 다른 삶을 게으르게 꿈만 꾸는 우리와 친구들도
누가 한 뭉터기 집어 서울 밖으로 통째 내쳐 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일흔 시간의 기차 여행이 끝났다. 
보드카 한 잔 털어 넣고 꿈꾼 듯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 새 정이 옴팡 든 사람들과 코끝 찡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들의 나라를 찾은 여행객이라는 이유만으로
대가 없는 호의와 환대를 베풀어 준 고마운 사람들. 

 

이리냐-나타샤 콤비, 차장 아줌마들. 
때마다 불편한 데가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 주고, 
역마다 내려 산책한답시고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우리에게서 보호자같은 시선을 떼지 않았던 두 분.
아침마다 활짝 웃으며 “도브라예 우뜨라(좋은 아침이예요)” 하고 건넨 웃음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감사했어요, 정말로요”라고 팔다리를 휘적이며 말하자 나타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아니예요, 천만에, 정말 아니예요” 하고 팔다리를 써서 대답해 모두를 웃게 했다. 
 

 

우리의 마지막 룸메 유라와 에드, 그리고 그들의 동료 옆 방 친구 빅토르.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 나오는 사관생도들처럼 어느 역에서 “헬로!!!!” 하며 문을 벌컥 열고 등장한 그들은
잠에 취해 정신 없는 나를 끌어내려 술을 먹이려 했었다 - 그들의 탑승시간 새벽 두 시.
누구처럼 “중동에 가면 위급 상황에서 너를 누이라고 할게. 다 널 위한 일이지” 라던 장군이
정작 실제 상황에서는 “아내는 자게 두고 나랑 놀자”고 막아 준 덕에 나는 무사했지만
자는 나는 아랑곳 없이 장군을 붙잡고 새벽까지 술판을 벌이며 시끄럽게 굴었다.
그러니 악당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저 허풍이 조금 센, 정 많고 순진한 러시아 시골 아저씨들.
우리에게 맛 보이기 위해 역 앞에 굳이 나가 사 와 손으로 뜯어 줬던 훈제 생선 오물,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남양주 외할머니의 러시아 버전이라고 불렀던, 믿을 수 없이 예쁜 노랑머리 올가 할머니.
마주 칠 때마다 우리 손을 꼬옥 잡거나 어깨를 감싸 안고 함빡 웃으셨고,
우리가 한국 말로 무슨 얘길 해도 알아듣는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하고 질문하셨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 아이처럼 좋아하며 모피도 한 번 두르시고, 립스틱도 곱게 바르셨던 귀여운 올가.
나오면서 “할머니, 건강하세요” 하고 말하는데 괜히 눈물이 울컥했다. 정말, 건강하세요.
길에서 스쳐 만난 우리들은 곧 서로를 잊겠지만, 
부디 신께서는 다함 없는 사랑으로 그네들의 삶에 늘 함께해 주시기를. 
 
이르쿠츠크 역 밖으로 나섰다. 어스름한 저녁의 푸른 빛깔과 차가운 바람이, 기분 좋다.


 

오오 여기가 시베리아의 파리로군요. 
예, 그런 거죠!
 
블라디보스톡과는 기분도 분위기도 다른 이르쿠츠크 옆 앞에서 좋다고 사진 찍곤
펼쳐 든 지도에 머리를 모은 채 어디로 가야 하나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였다. 
 
역에서 나올 때부터 우리를 계속 곁눈질하던 아저씨 무리 중
짙은 콧수염을 기르고 베레모를 쓴 한 덩치 큰 아저씨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장군 배낭에 매달린 텀블러에 10 코뻬이카 동전 하나를 던져 넣었다.
거칠게 부딪치는 금속성의 소리가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거북이처럼 움찔, 움츠러드는 목.
 
여행한 지 이미 닷새쯤 지났고 
기차에서 만난 러시안 친구들과 먹고 자고 즐겁게 지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낯선 생김새의 로컬들이 북적거리는 새로운 도시에 발을 디디니
가이드북마다 말하고 또 말하던 ‘유색인종 해치는 스킨헤드 조심’이라는 말이 귓가에 쟁쟁,
다시 긴장이 스민다.
 
그런데, 응?
“스파씨바(고맙습니다)!” - 순간적으로 쪼그라든 나와 달리 낄낄대며 호방하게 외친 장군의 그럴듯한 러시아어. 
 
왠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빠좔스따(별 말씀을)!” 하며 익살스런 큰 몸짓으로 되받은 아저씨와 아저씨 친구들이 
와르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얼음 같은 표정을 쨍그랑, 깨뜨린다.
의외로 여행지에서의 남편은 일상에서보다 대범하고 순간적인 판단과 반응도 나보다 훨씬 좋다.
여행에서 피어나는 건 내가 아니라 그인가.
 
순간 쪼그라진 심장은 펴지는 것도 금방,
피부색 노랗고 하얀 남자들을 따라 와하하하 웃으며 굿바이, 손을 흔들고 나니 
세탁기에서 막 꺼내 맑은 하늘에 탁, 털어 편 이불 같은 마음 - 
긴장과 경계심은 곧 공기 중으로 날아가고
기분 좋은 바람 냄새 풍기는 이 곳이 어쩐지 좋아졌다 .


트램을 타기 위해 허름한 매표소에서 구입한 10루블(400원)짜리 차표도,
난생 처음 타 본 낡디 낡은 트램과 트램이 건너 준 검푸른 앙가라강에서 느껴지는 바이칼호수도,
트램 안에서 ‘웰컴’하고 우리를 환영하며 이야기를 걸어 준 신데렐라 외모의 어느 여인네와
골목골목 남겨 둔 아주 오래된 나무집들도 
 
이르쿠츠크, 기대치 못한 보석이 될 거야 - 속삭인다.
 
그런 곳이, 있는 것 같다. 
길가의 가로수 가지까지 손 흔들어 우리를 환영해 주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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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

  1. 조기성 2010/10/25 11:19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  대댓글

    '공감'.....
    이라는 단어를 요 며칠 계속 되내이고 있습니다.
    참, 잘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T T

    드뎌 두분의 얼굴을 자세히 뵙네요~~ㅋㅋ

    어디가나 사람이 살고,
    사람사는 동넨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닐까란
    생각이 이 글 읽으며 문득 문득 드네요.
    여행은 내 속에 있는 편견과 마주하는
    영혼의 치료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ㅋㅋ

    • Abby. 2010/10/26 12:54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그러네요, 저희들 얼굴을 모르셨네요 간사님! :)

      네, 저도 여행이란, 그런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길게 길에서 머물면서 언젠가는 제 안의 세계를 넘어서는 여행을 하게 해 주십사 기도하고 있어요. 간사님 벌써 훌륭한 여행자가 되신 것 같은데요? ㅎㅎ

    • Jang. 2010/10/28 13:06 |  댓글 링크 |  수정 및 삭제

      간사님이 댓글을 다시면, 저는 그 댓을을 보려고 왔다가 포스팅을 다시 찬찬히 읽게 되요. 그러면서, 아 그랬었지. 다시 기억을 떠올려보게 되네요.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나라에서 어디에나 눈이 쌓여 있는 그곳이 그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