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발리에서 생긴 일 5. 우리들의 마마, 이부 이다(Ibu Ida)
길 위에/Indonesia, 2010 | 2011/05/12 12:43 | written by Abby.
[2010년 9월 1일]
마마가 너무 많은 것을 해 주세요. 무리가 되실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마음 상하시지 않게 사양을 해야 할까요? 무얼 어떻게 해 드려야 할까요?
아무도 이부 이다를 말릴 수 없어요. 그저, 그녀가 하는대로 따라주세요. 그녀의 마음을 받으세요.
그게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이예요.
어느 날 저녁, 페르디난드와 데시에게 마마에 대해 이야기하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우리들의 마마, 이부 이다 사모님의 보살핌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었다.
마마는 어려운 이들을 그냥 지나치시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을, 돈을, 마음을 아낌없이 쏟으신다고도 했다. 아니, 내 것 네 것 경계가 없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했다. 하나뿐인 마마의 딸, 닥터 데시와 같은 이름의 또다른 데시는 마마가 때때로 가서 시간을 보내시던 시설에 있던 아기였다. 유독 마마를 따르던 데시를 마마는 망설임없이 친딸로 삼으셨다. 심한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기였다. 그리고 그 딸이 스물 세 살이 되었다. 의사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랑 많이 받고 자랐음이 행동에서 배어나는 예쁜 아가씨다. 분명히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을 텐데, 늘 함께 다니는 두 모녀에게선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이부 이다를 마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나의 무지 때문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나이 지긋한 여자분에 대한 호칭이 이부였으니 이부 이다는 이미 이다 사모님, 이다 부인과 같은 존칭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했던 내가 우리 부모님보다도 연세가 많으실 것 같은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몰라 마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것을 알았을 땐 이미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마마라는 호칭이 익숙해진 뒤였다.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있어. 나는 알 수 있단다, 하나님의 뜻이야.
너희에겐 쉼이 필요한가보구나, 받아들이렴.
마마는 우리 둘에게 매일같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하시듯 우리들을 돌보셨다.
병실 풍경으로 마마가 다녀가셨는지를 알 수 있을만큼, 마마는 매일 우리가 먹을 음식과 필요한 물건들을 한아름씩 실어 나르셨다. 호주는 추울 텐데, 애비는 오피스에서 일할 거라면서, 하시며 우리들 가진 것이 너무 적다며 옷과 신발과 악세서리를 우리 배낭만한 큰 가방 가득 가져오시기도 했다. 퇴원하더라도 몇 일 더 쉬고 가는 게 좋겠다는 데시의 말을 들으시자마자 우리가 생각한 지역의 게스트하우스를 (가격 협상까지 해서!) 예약하고 직접 운전해 우리를 실어다 놓으셨다. 말 그대로 마마는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셨다.
한국에서, 우리는 언제나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았다. 늘 공간을, 시간을,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우리를 도울 기회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우리들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결혼할 때에도, 이만큼 키워 주셨으면 충분하니 넉넉하지 않은 양 쪽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말자 했다. 둘 다 어린 장남 장녀였으므로 (그런데 스물 일곱이 어린가!) 양 쪽 부모님 모두 마음만큼 해 줄 수 없음을 미안하고 애틋해하시면서도 너무 손내밀지 않는 우리들에게 못내 서운해하셨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우리 둘은 '뭐든 혼자서도 잘 하는 쿨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성숙한 어른스러움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발리에서, 우리는 언제나 도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뎅기열이 머문 내내 갓난 아이처럼 아무것도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었다. 도움이 없이는 끼니를 해결할 수도,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도, 길을 나설 수도, 누구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생면부지인 우리들의 필요를 채운 사람들의 돌봄 덕에 살 수 있었으면서도 폐 끼치지 않는 선의 도움을 가늠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 이상의 돌봄이 쏟아진다 느끼면 좌불안석, 부담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 둘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차라리 불편함을 감수하고 쿨한 척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들은 미숙했다.
아무런 계산 없이 우리들의 상황에 완전하게 자신을 맞추신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마마의 섬김에 나는 당황했다. 그 순간 마마에게 우리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 오신 강적 마마 앞에서 '괜찮다, 괜찮다'며 적당히 물러서려는 허술한 우리들은 맥을 못 추고 허물어졌다. 나는 참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실체를 드러내면서.
받을 줄 모르는 우리들의 도움과 사랑은 참 자기 중심적인 '적당한' 것이었다. 저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양하며 언제든 누구든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하는 것은, 마치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이 가르칠 준비만 되어 있는 것만큼이나 거만한 태도였다. 우리는 가진 것의 일부를 깔끔하게 한계 지어 나눌 수는 있었으나, 그것이 그녀처럼 우리 자신을 온전히 열어 내놓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우리 삶에 참견하고 간섭할 공간 역시 적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마마의 섬김은 우리들의 그런 태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말이나 생각보다 손발로 삶을 사시는 이들을, 당해낼 수가 없는 법.
어느 날 마마 다녀가시기 전 vs. 후
이부 이다, 데시, 패스터 야야
이부 이다, 데시, 야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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