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31일]
예정에 없던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장군은 태어나 입원이 처음, 내게도 간병은 처음이었다. 혼자서 씻을 수 없어 목에 수건을 두르고 세수를 시키는 건 내 몫이었지만, 눈코에 비눗물을 마구 바르는 수준이었다. 그는 울었다. 가엾게도.
장군의 일과는 단순했다. 이른 아침 피검사를 하고, 수액을 갈고, 밥을 먹고, 약을 먹고, 맛없는 이온 음료를 수시로 마시고, 잠을 잤다. 그는 마치 갓난 아이처럼 낮밤을 가리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첫 날, 몇 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지켜 보다 코 아래 손가락을 대 볼 정도였다.
첫 이틀,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보통의 경우 자연 치유되었어야 하는 시간보다 오래 앓고서야 병원에 온 탓이었다. 이미 몹시 낮았던 혈액 수치들은 바닥을 모르고 떨어졌고, 세 번째 검사에선 혈소판이 정상 범위 최저치의 10% 아래로 떨어졌다. 위험 범위 중에서도 숫자가 너무 낮았다. 혈소판이 부족해지면 출혈이 쉽게 일어나고, 그러다 내출혈이 일어나면 급격히 치사율이 솟는 병이 뎅기였다. 그는 자꾸 속이 이상하다며 밥을 넘기기 힘들어 해 나를 긴장시켰다.
그가 오래도록 잠을 자면 나는 동네를 산책했다. 클리닉 뒤로는 넓은 논이 있었다. 클리닉 앞으로는, 길 건너에 예상 밖으로 힌두 사원처럼 생긴 교회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길 양 쪽으로 교회랑 이 클리닉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을 걸어야 작은 동네 가게들, 집들이 보였다.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자주, 병실 앞 벤치에 나와 앉았다. 땅읍의 클리닉은 작은 요양원 같았다. 커다란 정원을 둘러싸고 진료실과 병실이 여러 방으로 나뉜 작은 건물이 있었다. 깨끗하고, 아름답고, 조용했다. 뎅기열은 병원에서도 특별한 처치를 해 줄 수 없이 기다려야 하는 병이니, 기도하며 마음을 다스리기에 좋은 곳이었다. 아픈 사람들과 근심 어린 표정의 방문객이 가득하고 간호사들이 무시무시한 치료 도구들을 드르륵 끌며 바삐 지나다니는 큰 병원이 아닌 것이 감사했다. 가만히 정원에 앉아 있으면 평화로워진 마음에 그가 곧 괜찮아지리라, 염려하지 말라는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혈액의 수치들도 바닥을 친 후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조금씩이었다. 의사가 병원을 나가도 좋다고 허락하는 순간까지 지독한 무기력증과 울렁증을 견디며 예의 그 단순한 일과를 반복해야 했다.
간호사들은 모두 우리를 살뜰하게 챙겨 주셨다. 매 끼 식사와 아침 시간의 간식까지 늘 우리 두 사람의 먹거리를 함께 준비해 주었다. 처치 외의 시간에도 가끔 들어와 뜨거운 물이 충분한지 커다란 보온병을 살피기도 하고,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섞어 내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네기도 했다. 타지에 와서 아픈 외국인 부부를 불편함 없이 돌봐 주고 싶어하는 인정이 느껴졌다. 고마운 일이었다.
닥터 데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늘 충분히 설명하고, 충분히 듣고, 발리 이후의 일정까지 고려하며 조언과 처방을 해 주었다. 병원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치 가까운 친구가 자신의 클리닉에 입원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돌봐 주었다. 페르디난드까지 퇴근 후 자주 우리를 찾아와 필요한 물건은 없는지, 시내에 나가야 할 일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 병원과 교회만 있는 이 곳에서 우리들은 먹고, 자고, 쉬고, 기도하는 일만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몸과 영혼을 위한 병원 외엔 아무것도 없는 기분이예요. 얼마나 사려 깊으신지(How thoughtful)!
클리닉에 입원한 지 몇 일 후, 장군이 아픈 것을 알고 헤어진 후 걱정할 동티모르 팀에게 메일을 보내며 적은 말이었다. 그랬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뎅기로 발리에 더 머문 열흘동안, 우리들은 완전히 멈췄다.
동티모르에서의 시간은 무엇과 바꿀 수 없이 소중했으나, 한편으론 한국에서와 비슷한 패턴의 역할과 행동이 필요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많은 사람과 일들이 우리를 의지하는 대부분의 시간 우리도 모르게 몸도 마음도 긴장한 상태였다. 즐거운 배움과 귀한 사귐이 있었으나, 여전히 우리 속의 신경줄은 팽팽했다.
완전한 돌봄 앞에 가만히 머물 수 밖에 없었던 발리에서의 시간은, 정말이지, 쉼표였다. 덕분에 우리는 정말로 그 간 살아온 삶의 리듬과 방식에서 단절되었다. 우리들을 돌아보게도 되었다.
그나저나 불쌍한 장군은 그나마 다시 뎅기에 걸리지 않을 테니 다행이야, 몇 번에 걸쳐 얘기했으나, 실은 뎅기는 여러 종류가 있어 다른 뎅기가 물면 또 걸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뎅기에 걸린 동안 멀쩡한 모기가 장군을 물면 그 녀석은 뎅기 모기가 된다. 읍.
체력을 잘 관리하는 수 밖에 없다. 체력과 여행력은 정비례. 가여운 우리 뎅기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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