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Let it go

길 위에/Timor Leste, 2010 | 2010/08/14 13:03 | written by Abby.
오늘 저녁 당번인 짤리(Chial-Li)가 보이지 않는다. 곧 나오겠지 하며 먼저 불을 피우고 쌀을 씻어 안치는데 멀리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짤리가 아니라 벤똥이다.

저… 짤리가, 울어요.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아요.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요.

흐음.. 올 것이 왔구나.

짤리 짤리 우리 짤리. 백팩을 메라던 TF의 신신당부에도 몸집보다 큰 트렁크를 끌고 와 티모르의 돌길에 쩔쩔 매던 우리 짤리. 그 큰 트렁크에서 타이완산 반찬과 간식을 끊임없이 꺼내며 왜 우리 배낭엔 먹을 게 없는지 의아해하던 도라에몽 우리 짤리. 가장 좋았던 여행지는 말레이시아, 백화점 물건이 저렴해서 쇼핑하기 신났기 때문이었다던 우리 짤리. 호텔에서 먹고 자며 진행한 지난 겨울 중국 소수민족 아이들과의 계절 학교 프로그램을 상상하며 이번 평화 캠프를 지원했다는 우리 짤리. 앞으로 해외 영업이나 해외 마케팅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데, 해외에 많이 갈 수 있을 것 같아서라는 우리 짤리. 짤리에게 라하네와 이 곳 생활은 딱 청천벽력이다.

스무 살만큼 생각하고 기대하고 행동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웬걸, 스무 살의 나는 이런 캠프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올가를 제외한 모두에게 태어나 처음인 이런 환경에서, 어쩌면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이 팀의 다른 멤버들에게도 당연하게 서른 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의 이해와 적응을 요구했는지도 모르겠다.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과 배려하는 것은 다른 문제인데, 사려깊게 살폈어야 했다 잠깐 후회한다.

저녁을 먹고 집 앞에 짤리와 둘이 앉았다. 선들선들 바람이 불고, 서로의 얼굴을 볼 수는 있되 너무 자세히 보이지는 않도록 적당히 어두운 좋은 시간이다. 차 한 잔 들고 앉으면 완벽히 사랑에 빠질 시간이로군, 입맛을 다시는 순간 짤리가 입을 열었다. 

 
… 종일 밖에서 사람들이 들여다 봐요. 밥 다 먹을 때까지 빤히 쳐다볼 때도 있어요. 체할 것 같아요. 프라이버시가 없어요. 올가에게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얘기해 달라고 했는데, 올가가 사람들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니라면서 듣지 않았어요. 무시했어요. 너무 화가 났어요.

그랬구나.. 맞아, 여기 애들은 정말 노골적으로 쳐다보더라.

우리 수업 끝나고 정리할 때마다 매일 서서 노려보다 가는 남자도 있잖아

그러니까요. 여기 사람들, 외국인에게 너무 못되게 굴어요. 어제 시장에서 사람들이 이유 없이 우리를 위협했어요. 장한테는 뒤에서 발길질을 했어요. 장 등 뒤에 걸린 모자가 펄럭일만큼요. 무서웠어요. 우린 자기들을 도와 주러 온 거예요. 왜 고마워할 줄을 몰라요? 이해가 안 돼요.
 



이런.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어제 시장에서 누군가 걸었다던 시비가 진짜 시비였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 시장에 갔던 멤버들을 다시 떠올려 본다. 장군, 영희 언니, 유끼 - 아아 이런. 시장 전체가 시비를 건대도 발걸음 템포도 바꾸지 않을 만사태평 삼남매였구나. 대수롭잖게 말하는 그들 얘기만 듣는 게 아니었는데. 짤리가 괜찮은지 물었어야 했다.


애비, 솔직히… 아이들도 사랑스럽지 않아요. 중국에선 이렇지 않았어요.
버릇없이 함부로 굴어요. 그러면서도 다가오지도 안기지도 않아요. 수업 시간에도 정신없고 거칠고,

그런데 뭘 시키면 막상 쑥스러워하면서 아무것도 못하고.
알렉스(Alex)는 제가 자칭 반장 노릇하면서 반장 노릇하느라
우리 말은 제일 안 듣고.

히히. 맞아요
.

그래 맞아.. 그런데, 그 모든 것 중 가장 힘든 게 뭐야?
 
내일 타이완으로 갈 수 있는 비행기 티켓이 없다는 거요.

.. 그러면, 그 와중에서도 여기서 제일 힘이 되는 건 뭐야?
 
아홉밤만 더 자면 갈 수 있다는 거요. 가자마자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버블티를 사 마실 거예요.


어이쿠야…


음…  나는 말이야.

…?

나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티모르의 아픔에 대해 생각 중이야.. 전쟁 끝난 지 고작 십년 후의 세상에서 사는 삶에 대해 말야. 나는 8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지금도 가끔은 생생하거든.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일 거야. 나는, 상상할 수 없는 큰 폭력은 인간의 세포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고 생각해.. 시장에서의 그 남자들도, 매일 우리들 곁을 서성이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를 거야. 이들에게 외국인은 언제나 괴롭히거나 군림하거나 빼앗으려 했던 존재였으니까. 적어도 그들의 태도가 ‘외국인’에 대한 것이지 애비나 짤리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조금 편해져.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 무섭게 볼 때가 있어요. 싫어하는
게 느껴져요.

맞아.. 그래서 나는, 여기서 내 나라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 타이완에도 있다고 들었어, 자꾸 생각나. 우리를 바라보는 이 사람들의 시선에 복잡하게 섞인 선망이나 질시 따위는 없이, 오로지 영문모를 경멸과 무시를 견뎌야 하는 처지. 인간이란 오가는 말이 없이도 타인의 눈빛 하나에 얼마나 쉽게 상처를 입는지, 고작 몇 일이어도 우리 마음이 이런데, 그것이 쌓이면 얼마나 마음이 너덜너덜해질지 말야. 


… 맞아요.  ...그래도... 그래도 우리는… 여기서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어요. 


맞아.. 무슨 말인지 알아. 나도 태어나서 이런 생활은 처음이야. 누군가는 아직도 늘 이렇게 산다는 게 참 대단하지 않니? 그래도 벌써 반이 갔잖아. 차마 여기서 시간이 날아간다고는 할 수 없지만,

히히

어쨋든 흘러갈 거야, 그것도 곧. 아, 그러니 꾹 참고 견디라는 건 아냐. 다만 내 부탁은, 네 마음을 팀에 얘기해 달라는 거야. 바깥의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문제도, 내일 팀 모임에서 같이 얘기해 보자.

얘기하기 싫어요. 모두들 힘든 거 알아요.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것까지도 얘기하면 되지. 그리고 얘기하지 않는다고 모르는 건 아니거든. 나는 가장 좋은 팀은 같이 맘껏 욕하는 팀이라고 생각해. 뭐든 같이 도마에 올려 놓고 왓더뻑, 쏘 어노잉, 타이완어로 뭐랬지?

니하우빤너!

니하우빤너! 한국말론 짜증나! 같이 두들겨 패서 훌훌 털고(Let it go), 우린 우리 갈 길 가는 거야. 매일 쌓이면, 매일 털면 돼. 그게 네 발목을 잡도록 놔두지 마. 누구도 혼자선 쉽지 않지, 그러니 팀이잖아.

아... 힘들어요. 여기, 생각했던 것과는 정말 달라요..

그런데도 잘하고 있어. 모두들 더 이상 잘 할  수 없지. 음.. 짤리, 내일은 말야. 아침에 책 읽지 말고 같이 산책하자. 공기가 좋아서 기분도 좋아져. 참, 강에 가는 길에 있는 나무를 알아? 나는 아침마다 거기서 시간을 보내. 그 앞에 앉아 있으면 뭐랄까, 좀, 살만해져.


히히.. 쏘울 트리라는 그 나무? 생각해 볼게요. 이만 들어갈래요, 애비, 고마워요.

얘기해 줘서 고맙다 짤리. 덕분에 위로를 받았어. 나는 나만 힘든 줄 알았거든.


아닌게 아니라 정말로 짤리와 이야기하며 위로를 받았다. 나는 여전히 스물의 짤리이기도 하고 서른의 애비이기도 했다. 짤리가 찡찡대며 한 이야기들은 내 마음을 짚어냈고, 내가 한 말들 또한 짤리에게 한 말인지 내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발길질이라니, 이 사람들 참.. 다시 생각하니 속에서 울컥, 주먹쥔 분노가 치민다. 아아. 어렵다. 발길질은 커녕 매서운 눈빛조차 같은 눈빛으로 되갚지 않는 것, 웃는 낯을 보이는 것, 끝까지 친절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실망과 서운함은 그 자리에서 털고 끝내는 것, 밖에나 안에나 그 무엇도 남기지 않는 것 -  Just, Let it go.

평화를 가르치기는 커녕 우리들이야말로 이제사 평화를 훈련하고 있다. 저 혼자 밀려든 화를 가라앉히는데도 이토록 애를 써야 하는데, 하물며, 평화라니. 거품처럼 입 안에서 터지고 마는 단어. 평화, 평화.

이보다 훨씬 적대적인 자들의 모든 악의를 뒤집어쓰고 죽으면서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고 빌었던 한 남자를 생각한다.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집채만한 분노를, 미움을, 냉소를, 작은 몸뚱이 하나로 막아서는 것이 정말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 정말이지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아닐까. 그조차도 몸을 던져 함께 산산히 부서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 아닐까.

평화. 
그가 죽음으로 이뤄낸 평화. 평화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새 장군이 옆에 와 앉아 있다.

뭐야, 어제 시장에서 발길질 당했다며. 그건 별 거 아닌 게 아니잖아.
아? 응. 그랬어. 대단한 거 아니었어. 그래서 내가 고개를 돌리고 엄한 눈으로 봐 줬지.
남편이 엄한 눈한다고 무서운 표정이 나와? 그래서 걔네들이 무서워했어?
아니, 나는 움찔하라고 최대한 무섭게 했는데 눈치 보니 전혀 아닌 것 같았어.

푸하하하하.

문득 옆에 앉은 그의 속눈썹 너머로
까만 하늘과 달빛에 비친 마을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평화로운 달밤의 풍경에 다시금 위로를 받는다 ㅡ 괜찮다, 괜찮다, 다아, 괜찮다.

아아. 남자여. 부디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깜냥엔 전 생애는 커녕 단 몇 일 조차도, 이렇게 벅찬 걸요.

Just, let it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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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래서, 그러나